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단순한 이야기, 간결한 언어로 감정을 뿌리깊이, 사정없이 뒤흔든다. 읽는 내내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물잔을 가슴에 품고 걷는 기분이었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 쏟고 말았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도 차분한 목소리와 절제된 방식으로 마음을 거머쥐는데, 그 힘이 놀라웠다. 아주 작은 손짓에 속절없이 끌려갔달까. 어느 순간 마음이 잔뜩 어려졌음을 알았다. 사소한 실수에 사나운 훈육이 아니라 다정한 농담이 돌아오더라도, 주인공 소녀가 그러했듯이, 좀처럼 마음이 느슨해지지 못했던 것이다. 책장을 더 넘기면 나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작은 악의 혹은 무심한 말 한마디로도 쉬이 상처투성이가 되고마는, 유약하고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소녀는 여름 한철 맡겨진 먼 친척에게서 기대치 못한 친절과 배려를 받고 안도하면서도 그 낯선 다정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데, 그런 소녀의 복잡한 심경에 완전히 몰입했다.
키건은 마음의 복잡한 작용과 성장의 과정을 놀라우리만치 섬세하고 정교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로 간결하게 말한다. 이야기 자체는 퍽 익숙하다. 배경이 꼭 1980년대 아일랜드 시골농장이 아니어도 무방할 듯. 이런 류의 이야기로는, 1980년대 캐나다의 에번리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대체불가 소설이 있지 않나. 어찌 보면 주제도 인물들도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서술하는 언어가 특별했다. 그래서 소녀는, 심지어 이름조차 드러나지 않는 소녀는 어떤 성장담 속 주인공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존재가 되었다.
마음을 움켜쥔 장면들, 작가의 절묘한 단어 선택과 탁월한 묘사, 밑줄 긋고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도 이 소설이 불러낸 ‘어린 나’조차 위로하고 성장시키는 대사들이 정말이지 너무 많다. 88페이지의 짧은 소설이 품고 있는 게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지 크게 떠들고 싶지만 동시에 어떤 말로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음을 안다. 마음을 고양시키는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말을 잃게 된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한여름 초목처럼 쑥쑥 성장한 소녀가 마음이 향하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리는 장면은, 특히 아버지를 두 번 호명하는 마지막 두 문장은 압도적이다.
“Daddy,” I warn him,
I call him. “Daddy.” p88
후유증이라면 후유증인데, 다음 책으로 바로 넘어가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선택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곁에서 새로운 계절들을 보내게 되었을까.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바라마지 않을 일이 끝내 벌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사 곤궁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해도, 소녀의 삶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지겠지. 그 삶을 사는 소녀가 이전과는 다른 이가 되었으니까. 소녀는 자신을 돌볼줄 알게 되었고, 세상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침묵을 귀히 여길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랑을 배웠다. 그 사랑은 그녀 안에 오래 머물러 그녀를 단단하게 키워내겠지. 그렇게 성장한 그녀는 타인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쫓아 새로운 삶으로 힘껏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소녀의 미래를 떠올리며 슬픔을 가라앉혔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남은 이야기를 오래 생각하게 하는, 좋은 소설을 읽었다.
덧. 이 소설의 정서를 유지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수다스러운 프루스트를 멀리했다...
“Her hands are like my mother's hands but there is something else in them too, something I have never felt before and have no name for. I feel at such a loss for words but this is a new place, and new words are needed.” p18
“I dip the ladle and bring it to my lips. This water is cool and clean as anything I have ever tasted: it tastes of my father leaving, of him never having been there, of having nothing after he was gone.” p23
“You don’t ever have to say anything,’ he says. ‘Always remember that as a thing you need never do. Many’s the man lost much just because he missed a perfect opportunity to say nothing.” p64
“See, there’s three lights now where there was only two before.’ I look out across the sea. There, the two lights are blinking as before, but with another, steady light, shining in between. ‘Can you see it?’ he says. ‘I can,’ I say. ‘It’s there.’ And that is when he puts his arms around me and gathers me into them as though I were his own.”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