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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l 05. 2024

J의 남서쪽

2017. 3. 4. 흙의 날.


          건물을 나왔을 때 생각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에 나는 걷기로 마음을 굳혔다. J도 마음이 가벼웠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카페와 박물관을 지나 작은 내천을 따라 걸었다. 공터마다 작은 아트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앙증맞은 액세서리와 수제 가죽가방 들, 다소 독특한 컨셉의 의류,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잼과 식혜 들, 봄을 불러들이는 듯한 파스텔톤의 향초들. 띄엄띄엄 놓인 가판대 사이를 사람들이 한가롭게 기웃거렸다. 옷을 구경하던 한 중년 여자가 다른 쪽에서 향초를 구경하는 친구를 호들갑스럽게 손짓하며 불러댔다. 그들은 소매에 날개가 달린 흰색 가오리 긴팔셔츠를 보며 예쁘다고 감탄했다. 그러자 내게 옷을 보여주던 젊은 주인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원피스를 보고 있었는데, 그 실내복은 주인이 권한 것이었다. 나는 옷 자체보다 그녀의 말에 붙들려 있었다. 말을 재치 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원피스를 '분리수거'하러 나갈 때 입고 나간다고 했다. “넘 예뻐서 다들 깜짝 놀란다니까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가 따라 웃었다. “이거 대박난 옷이에요, 검은색은 이거 하나 남았어요.” 주인이 다른 이들에게 간 틈에 나는 19,000원짜리 분리수거복을 행거에 그냥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때마침 J가 나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르르 달려와선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딴 짓은 이제 그만 하자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러고는 자기만 따라 오면 길을 잃지 않는다면서 자꾸 '남서쪽'이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는 남서쪽으로 가야 해. 엄마는 나만 따라 와. 지난번에 엄마 때문에 우리가 엄청 헤맸잖아. 기억나지, 엄마?” 우리는 북한과 서울을 기준으로 남북을 가늠한 뒤 느긋하게 걸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북동’쪽으로 걷고 있었지만 J는 ‘남서쪽'으로 맞게 가는 중이라 우겼고, 방위와 상관없이 직관적으로 걷고 있었으나 우리 모두 맞게 가고 있다고 믿었다. 


            이곳에서 단둘이 토요일 오후를 보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커플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걸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모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대기는 산책하기 좋을 만큼 적당히 데워져 있었다. 노르스름한 햇빛 속에서 달곰한 냄새가 풍겨왔다. 바깥 공기를 쐬면서 J는 기분이 유쾌해진 듯했다. 표정과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 이상 무표정하게 시간을 견디던 모습이 아니었다. 한 시간 남짓 미술대학장과 부시장과 담당교수의 개회사와 교육과정 취지와 안내를 들으면서, J는 굳은 얼굴로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 있었다. 발목을 꼰 채 무릎에 양손을 올려놓고선 안내책자를 만지작거리던 J. 앞을 보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은 듯 했던 J. 그때와는 다르게 J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빛내며 주위 풍경을 살폈고 쉴새없이 조잘거렸다. 


           "엄마, 나만 따라 오면 돼." 



        엄마를 리드한다고 믿고 있을 J의 기분을 생각해봤다. 
        J의 '남서쪽'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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