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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Sep 06. 2016

아이리스 그레이스의 세계

A NEVER BEFORE SEEN WORLD

그 책을 거머쥔 건 그 즈음 내가 자폐적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 지인의 아들이 자폐아라는 걸 알게 됐고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 탓만도 아니었다. 그저 그날 오후 좀비처럼 삭고 너덜너덜해진 듯한 기분으로 도서관을 찾았고 때마침 신간코너에 전시된 그 책에 시선이 머물렀으며 북 커버의 화사한 온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대충 훑어보고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빈 자리를 찾아 삼십여분간을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다. 흡인력이 상당했다. 시간에 쫓겨 독서할 여유가 없었는데도 결국 그 책을 빌려와서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을 펼쳤다.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폐아'라는 소재의 특별함도 있었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저자의 글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시선이 남달랐고 그걸 표현하는 재능이 있었다. 아이가 색을 다루는 재능은 자폐증과 상관관계가 있는 듯 보이지만, 엄마의 심미안도 유전된 것 같다.   


웨딩포토그래퍼로 일하는 한 평범한 영국여성이 딸을 낳았다. 아기는 굉장히 사랑스러웠지만 극도로 민감했다. 잠투정이 심했고 낯을 가렸다. 평소 모험과 도전을 즐기며 살던 여자는 그런 아이에 묶여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한 우울감에 휩싸이지만, 그저 한순간의 일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아이는 모든 면에 발달이 더뎠지만 모두 저만의 속도가 있겠거니 했고 아이의 예민한 성정도 그저 타고난 기질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았다. 아이는 자폐증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부모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어떻게 아이에게 세상을 접근시키고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칠지,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자신들이 어떻게 이해할지, 바깥세상에 아이의 자폐증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그들은 끊임없이 방법들을 고민하고 시도한다. 그 와중에 아이의 뛰어난 재능을 발견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훌륭한 동반자를 찾아낸다.

  

리틀모네, 아이리스의 그림은 안젤리나 졸리에게도 팔렸다고 한다.


아이리스 그레이스에 대한 이야기는 몇 년 전 '세상에 이런 일이' 류의 해외토픽으로 먼저 접했다. 세살 자폐소녀가 모네풍의 그림을 그려낸다는 뉴스였다. 그때 나는 그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속에는 부모의 좌절도 기쁨도 없었고, '아이리스 그레이스'라는 아이가 지닌 디테일도 없었다. 그저 리틀모네라고 불리는 자폐소녀의 진귀한 재능과 아름다운 그림만 있었기에, 그저 조금 놀라고 쉽게 잊었다.


아이리스의 베프, 툴라


책은 달랐다.


거기에는 '진짜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리스가 지닌 진귀한 시선이 있었다.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감각의 세계가 있었다. 아이리스와 세상을 연결시키려고 무던히 애쓰는 부모와 그들을 묵묵히 지원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무심히 읽다가 뭉클해졌고, 엄마가 글로 묘사하고 아이가 그림으로 표현한 아름다움에 가만히 숨을 멈추곤 했다.


Monsoon
Raining Cats

  

Row Your Boat



   유아원에서 아이리스가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았다. 창백하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동그란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또래 아이들 틈에서 아이리스는 유난히 키가 커 보였다. 아이리스는 물병을 들고 안에 물을 가득 채웠다. 다른 손에는 근래 항상 갖고 다니는 둥근 모양의 나무 퍼즐 조각이 들려 있었다. 아이리스는 물에 반쯤 잠겨 있는 장난감들 중 하나를 골라 그 위로 천천히 물을 부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이고 물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물결과 물방울을 열심히 관찰했다.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아이리스가 짧게 순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시원한 물 위에 손을 사뿐히 얹고 손바닥에 닿는 부력과 감각을 느꼈다. 나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모든 것이 고요해진 순간 속에 있는 아이리스를 지켜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교실의 다른 쪽으로 옮겨가 오전 간식을 먹고 있었지만 아이리스는 탁자 앞에 남아 있었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유아원에서 아이리스를 지켜보며 죄책감에 짓눌렸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잘될지도 모른다. 아이리스는 유아원에 잘 다닐 수 있을 것이다. (p149)

아이리스가 세밀한 부분에 흥미를 갖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나도 아이리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섬세한 부분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게 되었다. 내 자신의 감각 또한 살아나면서 더 깊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장맛비가 가든 룸 지붕을 세차게 두드렸다. 주방 입구에서 보니 아이리스가 창가에서 커다란 빗방울들이 베란다 위로 떨어졌다가 튀어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닥에 수많은 동심원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가녀린 몸을 똑바로 편 채 꼼짝 않고 서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팔짝 튀어 오르더니 창문 밖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흉내를 내면서 뛰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리스는 나를 돌아보고 미소를 짓더니,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문으로 데려가 문손잡이를 잡게 했다. 아이리스가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자는 의미였고 우리는 용감하게 밖으로 나갔다. 타닥-타닥. 아이리스가 맨발로 걷는 소리와 빗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아이 스스로 평온을 지킬 수 있도록 요가를 가르치고, 지나친 자극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정원에 마련해주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악기들과 미술도구를 소개해주고, 세상과의 통로 역할을 하는 고양이 친구를 만들어주는 등등의 일을 많은 부모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특히 먹고 사는 일에 몸이 지치고 경쟁과 비교에 상처받은 이들로 들끓는 이 한국사회에서는. 하지만 아이리스 부모의 이런 특별하고도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이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아이가 보는 세상을 가능한 한 똑같이 바라보고 느끼려는, 그래서 이해하려고 애쓰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이렇게 아이를 깊이, 오래, 들여다본 건 언제였을까.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확실한 건 어느 순간부터 '말없이 보고 귀 기울이는' 것을,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에 감동받는 일을 멈췄다는 점이다. 아이가 제 목소리를 낼수록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바라는 대로 아이를 다듬으려 했다.

    

저자는 말한다. “딸이 좋아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주제로 소통하면서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단지 내가 자폐아를 키우는 엄마의 육아이야기로만 이 에세이를 읽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글로벌한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좀더 경쟁력 있게 아이를 키우자는 외침이 그 어느때보다 극성스러운 것 같다. '이 시기'에는 '이것'을 놓치면 큰일난다는 잔소리가 왜 이렇게 많은지. 그 많은 걸 잘 해내는 아이들이 경이롭게 느껴지지만 한편 안쓰럽게도 보인다. 내 아이에게 그런 짓은 못시키겠다고 하면서도 내가 아이를 방치하는 건 아닌지 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다.          


아직 아이가 본격적인 경쟁의 장에 돌입하지 않았으므로 ^^: 어쩌면 맘 편한, 혹은 순진하게만 느껴질지 모를 고백을 하겠다. 내 아이가 경쟁력 있는 사회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 내 아이도 아이리스처럼 세상의 세속적이며 화려한 자극이 아니라 평범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에 눈 뜰 수 있기를 바란다. 나 또한 아이리스의 엄마처럼 아이 본연의 모습에 끊임없이 감탄하기를, 그리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https://youtu.be/toNhSR_FB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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