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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01. 2016

양사나이 말고 Enola Gay

2016. 10. 1. 흙의 날. 아이가 가을 바람에 재채기를 했다

   며칠 만에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으로 돌아왔다. 

   오래 전에 구입한 열림원의 1997년판을 더는 읽을 수 없었다. 남자 주인공이 툭하면 '그대'라는 단어를 내뱉는데 견뎌낼 재간이 없다. 문학사상 출간본(2009)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화자 '나'와 여자친구가 차를 타고 공항 가는 길. 배에는 이름이 있는데 비행기에는 왜 이름이 없느냐는 화자의 질문을 시작으로 세 사람의 말장난 같은 대화가 시작된다. 운전사는 말처럼 사용되는 비행기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면서 '에놀라 게이(ENOLA GAY)'를 예로 든다.




   미 공군 B-29 폭격기 기장, 폴 티벳츠 대령

   때는 1945년 8월6일 새벽 2시45분. 승무원 12명과 폭탄 4.5t을 실은 미 공군 B-29 폭격기가 이륙하기 직전이다.  폴 티벳츠 대령이 조종석 유리창 아래에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적게 한다. 이윽고 미 공군의 중폭격기 발진기지가 있던 티니언 섬을 이륙한 폭격기는 오전 8시 15분에 일본 히로시마 상공 9,500m에서 원자탄을 떨어뜨린다. 이 인류 최초의 원자탄에도 이름이 붙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소년’(little boy)이다. 이 작은 녀석이 떨어지자 약 14만명이 죽고 28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가운데 조선인도 상당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히로시마 기계제작소’,’히로시마 조선소’에 강제징용된 노무자들 오만명 가량이 고스란히 피폭당했다. 그리고 삼만명이 죽었다. 전체 피해자의 10%에 해당한다고 한다.


    얼마 있지 않아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서안(西安)에서 광복군의 본국진입을 준비중이었다. 김구는 중경으로부터 긴급전화를 받고 이 소식을 알게 된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기술한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폭 투하로 인한 항복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종전이 이뤄졌다면, 김구의 뜻대로 대한민국의 자력광복이 이뤄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친일청산이 확실히 이뤄졌을까. 6.25가, 4.3 제주항쟁이 여전히 일어났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때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미 참전군인단체와 원폭피해자단체와 환경단체 사이에서 원폭 투하에 대한 정당성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클린턴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에 대해 사죄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No라고 대답하면서 논쟁을 재점화시키기도 했다. 그의 대답에는 일본이 원폭 피해국이 아닌 침략국이라는 사실과 원폭 투하가 결과적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시켰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시하려는 의도가 서려 있었다.


2015년 한 미국 경매회사가 경매에 출품한 로버트 루이스의 비행 계획서와 관련 편지. 

 

   폭격기의 기장, 티베츠 대령은 생전에 대통령이 하달한 명령 수행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1994년에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이 2차 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되풀이돼서는 안 될) 마지막 행동: 원자탄과 2차 세계대전 종전’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준비하자, 그는 침략자인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돕는 이런 전시는 '모욕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2005년 원폭 60돌 기념식에서는 "원자탄의 사용은 전쟁의 조기종식을 가능하게 했고, 추가적인 피해와 무고한 희생을 막았다"고 했다. 하지만, 생전에 남긴 저서에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심경을 고백한다. 

“다시는 핵 무기 사용을 강요당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4년 당시 에놀라 게이의 마지막 생존 승무원이었던 시어도어 반커크 또한 원폭투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임무 수행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원자폭탄은 없어져야 한다”, “원폭이 모두 파기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도 말했다. 게다가 그는 생전에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참전사실을 공개하길 꺼렸고 그의 아들은 다락방에 보관돼 있던 신문을 통해 아버지의 참전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는 편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오 하나님, 우리가 무슨 짓을 한겁니까?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그는 자신이 100년을 산다고 해도 머릿속에서 이 단 몇 분을 지우지 못할 거라고 고백했다. 



    그들은 애국심으로 무장한 전쟁영웅이기 이전에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침략국의 항복을 이끌어낸 결정적 임무 수행에 자부심을 지닌 한편 너무 많은 목숨들을(민간인들과 강제징용된 희생자들까지) 한줌의 재로 없애버린 일에 대해 죄의식도 느끼는, 평범한 인간. 


    참전 군인들이 '외상후 스트레스'로 고통스러워 하는 건 그들이 전쟁기계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일 테지... 


하루키의 책을 읽다가 엉뚱하게 역사순례를 했다. 

폴 티벳츠 기장이 원자탄을 투하한 폭격기에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썼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는 그 순간, 어머니의 이름이 영광스런 종전의 상징으로만 기억될 거라 믿었을 것 같다. "되풀이돼서는 안될 마지막 행동"의 상징이 아니라. 
Enola Gay는, 그렇게, 종전의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피폭2세를 포함한) 수십만의 희생자를 낳은 폭격기의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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