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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13. 2016

지폐로 죽을 못쓰는 이유

2016. 10. 12. 물의 날. 드디어 기침이 잦아들었다. 콜록. 


1. 세탁기에서 젖은 지폐를 발견했다. 1000원짜리 지폐의 상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잘 펴서 식탁에 올려놓았다. 젖은 지폐를 말리던 세월호의 선장이 떠올라 언짢아졌다. 살면서 젖은 지폐를 볼 일이 잦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연상이 계속될 것 같아 불쾌했다.


2. 얼마 전에 <설리:허드슨강의 기적>을 온가족이 같이 봤다. 집에 있겠다는 딸을 억지로 끌고 갔다. 진정한 리더쉽과 전문지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위기 앞에서도 어떻게 한 인간이 자존감, 도의, 위엄, 품위 등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이런 리더도 '실재'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세월호의 선장과 비교하며 분개했다. 이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몇년 전 우리가 맞닥뜨린 참사를 떠올리며 또 다시 분노하고 슬퍼했겠지.



비행기가 빠르게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마지막까지 남아 뒤쳐진 승객이 없는지 확인하고서 일지까지 챙겨나오는 기장. 시장이 보자는 말에, 구조작업이 아직도 진행중이므로 자신은 자리를 뜰 수 없다고 딱잘라 거절하는 기장. 155명이라는 생존자수를 확인한 뒤에서야 비로서 깊이 안도하는 기장. 하지만 그날 밤이 깊어지도록 제복을 벗지 못하는 기장(의 모습에서는, 그 또한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도, 혈압이 평소의 세 배 가까이 치솟은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기장으로서의 책무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호텔방에 돌아와 재킷을 벗고 지갑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으려다가 문득 지갑을 펼친다.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그는 지갑에서 도대체 뭘 꺼내려고 하는 걸까. 그가 꺼낸 것은 포츈쿠키의 운세였다. <A Delay is Better Than A Disaster.> 아무렴 젖은 지폐따위는 아니겠지. 아무렴 지연되고 지체되는 게 대형참사가 일어나는 것보다 훨 낫지. 


3. delay를 못 견디는 기질 탓인지 그로 인한 시간적 경제적 손실이 그리도 가슴아픈 탓인지 "우리가 먼저/빨리/더"를 외치는 이들-특히 그런 리더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지... 공적 책무감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진 리더들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disaster가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 같아 걱정이다. (국정감사 뉴스를 보다가 뒷목 부여잡았다!) 영어/수학 조기교육이 아니라 도덕/인성조기교육, 문해력/의사소통능력 신장에 힘쓰지 않으면 국운이 이대로 기울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작가의 말마따나 "부끄러움"도 가르쳐야 하나 보다.

 

     


4. 지폐를 지갑에 도로 넣다가 지난 계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훑어봤던 책이 떠올라서 도서관에 들렀다. 마크 미오도닉의 <사소한 것들의 과학>. 나는 <일상 속의 사소한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쩐지 내가 받은 첫인상이 고스란히 제목으로 굳어진 것 같다. 원제는 번역제목보다 더 간결하고 단도직입적이다. <Stuff Matters>. 재료, 중요하지. 어떻게? 왜? 작자는 평이하고도 감성적인 언어로 재료별 미시세계를 묘사하고 설명한다. 일상에서 매일같이 맞닥뜨리지만 그 실체를 알지 못했던, 관심조차 없었던 재료들의 세계가 이렇게 흥미로울 수 있는 건 순전히 작자의 뛰어난 필력 덕분이다. 챕터별 구성방식도 독특하기 짝이 없다. 나는 자신(인간/삶/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 세상(형이상학적이고도 추상적인 세계)로 뻗어나가는 식의 이야기를 편애한다. 일단 접근용이성이 뛰어나달까. 가령,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나 크리스틴 맥킨리의 <일상적이고 감상적인 물리학 이야기> 같은 책들. 이 책도 그렇다. 기차에 우연히 마주 앉은 딱딱하고 지루한 인상의 외국인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서 지역색이 물씬 풍기는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 교과서가 아니라 이런 책으로 과학을 접했다면, 내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신등급만큼은 확실히 바뀌었을 것 같다...



세상의 종이 가운데 가장 복잡하며 '멸종위기종'인 화폐. 

화폐는 다른 종이와 달리 나무 셀룰로오스가 아니라 '면섬유'로 만든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지폐의 강도는 다른 종이에 비해 세고, 비에 젖거나 세탁기 안에 들어가도 잘 분해되지 않을 뿐더러, 위조하기도 어렵단다.
전문기관에 맡기지 않고 위조지폐를 판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요오드 펜으로 끼적여보면 된다. 요오드는 종이의 전분 성분과 반응하면 검은색 자국을 남긴다. 하지만 면섬유에는 전분성분이 없어서 아무 흔적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문득, 신문지를 짓이겨 종이탈을 만들던 기억이 떠올랐다. 돈이 아무리 남아 돌아도 지폐로 탈을 만들지는 못하겠군. 전분성분도 없고 강도도 세서 물에 풀어지지 않으니 밀가루풀을 넣는다 한들 제대로 된 종이죽, 아니 지폐죽은 애시당초 글러 먹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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