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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16. 2016

오늘의 언어 수업

2016. 10. 14. 쇠의 날. 머플러로 목을 친친 감고 다녔다.

싱크대 앞에 서서 심각하게 따지고 있었다. 흰색 싱크볼의 소재와 점점이 박힌 때의 정체와 모든 묵은 흔적을 다 지운다는 매직폼의 성능에 대해. 이 셋의 궁합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때 거실에서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애플 스펠링이 뭐야?" 

헉. 

목표도 불분명한 영어공부로 아이를 고문시키고 싶지 않았다...지만 '애플'을 물어볼 줄이야. 때마침 남편이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마눌은 전직 영어교사이고 딸내미는 5학년인데, 그런 따님이 그런 엄마에게 다름아닌 '애플'의 스펠링을 묻고 있다. 남편은 가출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아니, 나를 가출시키고 싶어질지도.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싱크대를 매직폼으로 더 세게 문질러대며 스펠링을 생각나는 대로 불러보라고 소리쳤다. 아이는 le로 끝나는지 la로 끝나는지 헷갈린다고 했다. 그래, 내가 싱크볼의 묵은 때는 못 지워도 애플 만큼은 확실히 가르쳐주마. 나는 너덜해진 매직폼을 휴지통에 던져놓고 전투적으로 손을 씻었다. 

아이 앞에 A4용지 한 장을 놓고 maple을 적었다. 아이는 단어를 보자마자 바로 소리내 읽었다. 아이가 씩 웃었다. 

"메이플 스토리!" 

"메이플 시럽도 있잖아."

turtle을 적고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가 코웃음을 쳤다.  

"엄만 날 뭘로 보고. 터틀. 거북이잖아." 

이번에는 shuttle을 적었다. 아이는 '슈틀'과 '셔틀' 사이에서 헤매다가 눈치껏 셔틀에 정착했다.  

"무슨 말인지는 아니?"

"빵셔틀?" 

"그래, 그 셔틀. 매점이랑 교실을 왔다갔다 하게 하니까... 원래 셔틀이란 게 두 장소를 왕복하는 비행기나..."

"응. 안다고. 셔틀버스의 셔틀이잖아."

그래, 셔틀도 알고 터틀도 알고 메이플도 아는데 애플의 스펠링이 헷갈렸구나,라는 말은 물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영어에는 le로 끝나는 말은 굉장히 많은데, la로 끝나는 단어는 많지 않아. 이거 읽어볼래?" 

나는 gorilla를 적었다. 아이가 이제 차이를 알겠다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러더니 발음이 웃기다며 큭큭거린다. 애플라, 애플라, 라라라, 아이가 흥얼거리며 하던 일로 돌아갔다. 아이는 영어공부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주 거대한 사과. 제목은 <어린이를 위한 쉬운 사과 분석>. 그림이 아니라 보고서인가? 

나는 싱크대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 더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어공부라는 게 너무 일찍 시작해도 고문이지만 너무 늦게 시작해도 고문일 거다. 일주일에 영어동화 한 권은 같이 읽기로 마음 먹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읽은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따로 단어 암기를 시키지도 않으니까 오늘처럼 해맑게 애플 스펠링을 묻는 일이 벌어진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어린이를 위한 쉬운 사과 분석> by J

로만 야콥슨은 아이의 옹알이 속에는 다른 언어에서 각각 변별적으로 존재하는 소리들이 모두 들어 있다고 했다. 가령, 영어의 /r/,/l/과 한국어의 /ㄹ/ 같은 변별적 대립 음소들. 그는 이것을 "극치의 옹알거림"이라고 명명했다. 말인즉슨, 특정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아이는 인간 언어의 모든 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이도 아이는 모국어 습득의 첫단계에 접어들면서 이 조음능력을 상실한다. 이제 모국어의 음소도 단계를 밟아가며 '다시' 익혀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대니얼 헬러-로즌은 <에코랄리아스>에서 이를 두고 "언어적 유아 기억상실 또는 음성 기억상실"이라 표현한다. 
"아이는 한 언어의 현실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언어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무한한 땅을 떠"난다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생후 몇 개월만에 "분화되지 않는 소리를 무한히 조음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사춘기가 지나면 되지 않는 발음을 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때 어느 나라의 특정 도시에서 영어발음 하나 때문에 어린 아이의 설소대를 절제하는 야만적 시술이 유행했다는 도시전설이...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의 현실에 사로잡혀 다른 현실에의 모든 가능성을 잃게 된다... 
이런 일이 비단 '언어 습득 영역'에서만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때때로 자신에게 심각하게 묻는다.

그 모든 가능성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아이가 아이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타자인 나로 인해 하나의 상태로 규정돼 버리는 걸까.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내 시선이, 내 말과 행동이, 거기 담긴 내 가치관과 세계관, 아니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이 그저 내 욕망이 아이의 세계를 규정/확정짓고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엄마 노릇하는 게 영 자신이 없다. 

 

사실 상자를 여는 것만으로도 고양이의 상태가 결정된다.  하지만 고양이가 있을 수 있는 상태는 세 가지다. 바로 살아있음, 죽어있음, 그리고 깊은 빡침이다. - 테리 프래쳇  


 어린 자식이 있다면 최선의 능력을 다해 돕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일이다. 존재할 공간을. 아이는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다. -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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