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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Sep 24. 2017

윤이형, <피클>

Axt no.014 (2017. 09/10)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피클 단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속의 이것들이 우리죠.
사진 속 단지에 든 오이 몇 조각을 차례로 짚으며 강사가 말했다.
- 혐오와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서, 나 혼자 아무리 올곧게 살겠다고 마음먹어도 물들지 않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죠. (p134) 


윤이형 작가의 <피클>은 직장 내 성폭력을 다룬다. 작가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3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30대 후반의 편집기자,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 선배, 섣불리 나서지 않고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그래서 상사로부터 ‘생각도 깊고 말 안 옮기는 애’라는 평을 듣는 사람. 주인공 선우는 얼마 전에 퇴사한 기자, 유정으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자신이 편집장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면서 도와달라는 메일이었다. 

“왜 나였을까.” 선우가 가장 먼저 던진 질문. 이건 작가가 던진 질문인 것도 같다. 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해야 할까. 


작가가 선우에게 부여한 배경은 이렇다. 

그녀가 한때는 ‘싸우는’ 사람이었다는 것.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피켓 시위에 참가하고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사람. 그렇다면 이야기가 빤하게 흘러가겠지. 작가는 갈등의 조건을 만들어놓았다. 엄청난 전세대출금에 친정 엄마의 세 번의 수술과 간병인 비용을 대기 위한 또 다른 빚까지 얹어놓은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연봉이 낮았는데도 경영악화라는 이유로 남편의 임금을 30% 삭감시킨다. 이제 선우에게는 따박따박 받는 월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건 바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자. 대개 우리는 이런 위치에 놓여 있으니까. 또한 그녀의 사연은 얼마나 흔한 것인가. 누가 그랬더라.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열정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도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은 바보라고. 한때는 이상으로 가슴이 뜨거웠으나 이제는 현실적 고민으로 머리가 뜨거운 사람들이 한둘인가. 빚에 쫓기는 우리의 주인공도 이제 ‘생각 같은 건 사치’라고 혼잣말 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인공을 더 고민스럽게 만든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단순한 선악 구도에 놓지 않았던 것이다. 

편집장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 평기자였을 때의 별명은 ‘매너맨.’ 게다가 둘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회사에서 돌았다. 피해자 유정의 블로그에 휴가 가서 둘이 찍은 사진과 선물로 받았다는 시계 사진까지 올려져 있었다. 유정은 여자 기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유부남과 사귀어 기사를 많이 얻어냈다는 소문. 거짓말을 잘 한다는 소문. 실제로 유정의 블로그 게시물에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선우가 블로그 게시물 속에서는 유정을 도와 행동하는 선배로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선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를 믿어야 할까. 그냥 방관자가 되어야 할까. 피해자의 편에 서서 행동해야 할까.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윤이형 작가가 이제까지 그려왔던 “상징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작가는 이렇게 토로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 내면의 굴곡에 따라 노을이 지고, 파도가 치고, 괴물들이 출현할 뿐인 세계를 만드는 일이 떳떳하지 않게 느껴진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존재하는 단단하고 엄연한 세계를 보고 거기 있는 삶들을 그려내고 싶다. 지금은 여기 있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갈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장르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축해내는 세계가 내게는 ‘단단하고 엄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오래도록 그 세계에 머물기를 바랐다. 


<피클>을 읽고서 이제 작가는 자신이 바라던 바 세계를 옮겨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현실에서 회피할 수 없던 질문들을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세계 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려 했구나. 그리고 그 질문들을 독자에게도 던지고 있구나. 


소설을 읽으면서 나 또한 질문들을 멈출 수 없었다.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3자의 입장이란 게 무엇일까. ‘객관적 진실’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이 소설이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물론 각자 다른 질문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질문에 대한 답도 다를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성폭력’에 관한 질문들이 되풀이되고 깊어지고 확장되기를 바란다. 좋은 소설은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 들었다. 


<피클>은 좋은 소설이다. 


게다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지는, 환상적인 엔딩을 지니고 있다. 이 마지막 장면에 작가 고유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 같아 작가의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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