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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Nov 18. 2017

자기애적 사회에 관하여

크리스틴 돔벡의 에세이 &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

I’ll bet you think this song is about you.
- Carly Simon, “You’re So Vain”



0. 부제가 ‘자아도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지친 당신에게’이다. 

그러하여 이 책을 집어든다면, 기대했던 답을 듣지 못할 것 같다. 일명 ‘나르시시스트’ 퇴치법, 적나라한 심리 해부와 적확한 분석, 그리고 그간의 고통에 대한 다정한 위안 같은 것 말이다. 오히려 전혀 원치 않는 대답을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나르시시스트로 공격할수록 자신을 나르시포비아(Narciphobia 나르시시스트 공포증) 환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 


“그러나 상대방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바로 당신 또한 공감하지 못한 순간이다.(p141)”



1. 그렇다고 이 책이 나르시시스트로 대표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와 ‘나르시포비아’로 양분시켜 편가르기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흑백논리적 믿음’을 경계한다. 


“(철학자 애덤 모턴이 하려는 얘기는 이렇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려 할 때, 공감을 통한 이해를 가장 제약하는 요소는 우리 자신을 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섬세하거나’ ‘품위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점이다.(p145)”


“나쁜 연인, 밀레니얼 세대, 살인자의 경우, 실제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은 그들과 달리 반듯한 사람이라는 생각뿐만이 아니다. 인간적인과 비인간적임은 명확히 구분된다는 흑백논리적 믿음, 정신‘건강’에 대한 믿음 또한 장애가 된다. ...자신은 반듯한 사람이라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바로 반듯한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자, 감정을 깊이 공유하는 행동을 방해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p152)”



2. 어느 해 폭풍이 수물네 차례 미국 동북부를 강타했다. 일기 예보 전문 유선 방송의 요청으로 한 고등학교의 라틴어 수강생들이 이 폭풍들에 아틀라스, 야누스, 헤르쿨레스 등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을 붙였다. 해당 방송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붙이면 복잡한 폭풍에 대해 설명하기가 훨씬 쉽다.”
 라벨링의 위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르시시스트 성향’이라고 너무 쉽게 낙인을 찍는다. 특히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에 대해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관심한 이유를 우리가 그들 눈에 그다지 흥미로운 대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절대로 그들의 관심을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결함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이 병적일 만큼 과도하게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다고 비난한다. 우리보다 그들이 훨씬 중증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과보호하는 습성에서 벗어나 상대방과 반반씩 양보할 능력이 없는 질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 르네 지라르


3. 이 신화, 심리학, 철학, tv리얼리티 쇼와 유명 인사들에 대한 에피소드까지 끌어들여 현재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과도한 자기애 현상과 그 질병의 역사를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방향의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때부터 책의 몰입도가 굉장했다. ‘자아도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겨냥돼 있던 총구가 그들에게 지친 이들에게로 돌려졌던 것이다. 이런 책이겠거니 하는 예상을 무너뜨리며 작가는 전혀 다른 각도로 나르시시즘을 성찰한다. 


“우리는 의존적이고, 우발적이고, 공허하고, 부자연스럽고, 되비추어지고, 서로를 모방함으로써 만들어진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사소한 폭력이 확산되는 광경을 날마다 컴퓨터 화면을 목도한다. 지라르는 이를 ‘희생 제의적 위기sacrificial crisis’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와 다르다고 구분하려고 하는 것마다 모두 너무나도 우리와 닮은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을 말한다. 그리하여 가식적이고 공허한 대상은 제단에 바치고, 우리가 그들을 제물로 바칠 때마다 우리는 공감할 줄 아는 부류인 ‘우리’편에 서게 된다. (p168)”




4. 의도치 않았지만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와 나란히 읽어서 더 좋았다.

 


   <누구>는 한 청년이 닉네임 뒤에 숨어서 자기애로 충만한 주위사람들을 관찰하며 비웃지만 사실은 자신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음을 통렬하게 깨닫는 이야기다. 서스펜스는 1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갈등구조도 없이 잔인무도한 사이코패스나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라 앳된 얼굴의 뽀사시한 청춘들만 등장하는데, 마치 미스테리 소설을 읽을 때처럼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SNS 세계의 허세와 위선을 폭로하는 이 날선 목소리를 편하게 흘려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두 번의 결정적인 ‘폭로’가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손쉽게 이뤄진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이모 아니 큰누나의 마음으로 주인공을 쓰담쓰담해주고 싶었다. 읽고 보니 이 또한 성장담이었다.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점이 될 때까지 숙성”시키지 못해 자신이 볼썽사납게 느껴질지라도, “10점이어도 20점이어도 좋으니까” 자기 속의 것을 용기 있게 꺼내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지라르는 ‘자기애적인 착각’을 꿰뚫어 볼 적임자는 소설가들이라고 늘 주장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가 사랑하는 여성을 자족감과 ‘자율성’이 충만한 여성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묘사한 여성 나르시시스트와 흡사하다. 지라르에 따르면, 프루스트는 자기애적인 착각을 해체했고, 그의 상상력은 더 이상 상대방이 신비에 싸인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프루스트는, 플라톤이 우려한 대로 실제 존재를 가리기는커녕 오히려 실체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 낸다. 프루스트가 자기애적인 착각의 가림막을 걷어 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여느 소설가처럼, 모턴처럼, 우리가 지닌 되비추기 기능을 활성화시키되, 우리로 하여금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동시에 다양한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바깥으로…나아가도록 해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p170)”


         


 5. SNS 세계의 허상과 위선에 대한 이 소설이 내게 ‘당신은 과연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면, 크리스틴 돔벡의 에세이는 내게 길을 제시했다. 사실은 나 또한 누군가를 나르시시스트로 규정하고 멀리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불편했던 이유는 그이에게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진단에 매몰”되는 위험을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이해하려면...추측하고 헤아려 보는 자세로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실제로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 즉 자기가 속한 시간과 공간 속에 스스로 매몰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복합적이어서 한동안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하겠지만.(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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