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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Sep 12. 2018

어제보다 나은 삽질을 위해

호프 자런의 <랩걸 Lab Girl>: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1. 밑줄


근래 들어 이렇게 밑줄을 많이 그었던 책이 있었던가.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 이후로 처음인 듯.


나는 책을 함부로 대하는 편이다. 귀를 접고, 밑줄 긋고, 메모하고, 심지어 찢기까지 한다. (시집과 잡지의 경우, 몇 장을 뜯어내 호주머니에 쑤셔 놓거나 손에 들고 다니며 읽기도;;) 아끼는 책일수록 더 망가져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줄 수도 팔 수도 없는 책이 많다.

그래서인지 타인의 낙서와 밑줄에도 너그러운 편이며 그 또한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살핀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속에서 발견하는 밑줄, 포스트잇만이 아니라 심지어 난데없이 껴 있는 영수증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이 사람이 파리바게트에서 우유식빵과 애플파이 두개를 고르던 때 이 책을 들고 있었겠구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내 <랩걸>은 어느 누구에게 줄 수도 팔 수도 없다. 밑줄을 그어놓은 대목마다 나란 인간의 현 상태와 정서와 깨달음과 다짐이 지나치게 많이 담겨 있다.



2. 빚


빚을 지고 사는 인생 같다.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가령, 랩걸 같은 책을 읽고 호프 자런 같은 과학자를 알게 될 때.


도다 세이지의 만화 <이 삶을 다시 한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벌거벗은 여자가 등장한다. 옷이 필요하다 생각하니 옷 한 벌과 함께 의상디자이너와 봉제공장 직원이 나타나고, 배가 고프다 생각하니 농부, 어부, 요리사, 도공, 농약과 사료 연구원 등이 나타나 밥을 준다. 집이 필요한 그녀에게 설계사와 건축업자가 다가와 집을 지어주고, 자연, 자원, 에너지 등등 그렇게 그녀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세상이 뚝딱 만들어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친구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잠에서 깬다.

알고 보니 그녀는 히키코모리.

자발적 감금의 135일째 되는 날 아침, 그녀는 자신을 위해 온 세상이 만들어지는 꿈을 꾸고는 방을 빠져 나온다. 엄마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는다. 단편의 제목은 'Making World.'


세상과 단절된 듯 느껴진다 하더라도 숨을 쉬고 있는 한 내 존재를 온 세상이 떠받치고 있다. 알게 모르게.

내가 보낸 하루의 무탈함에 누군가의 전 인생이 담겨 있다.



3. 삽질


언젠가부터 구체적인 형태로 그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생각만 하다가 끝나는 일도 많아졌다. 그 결과를 따지지 않고 뛰어들던 시절도 분명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러니까 되돌릴 수 없는 것, 결코 잃을 수 없는 것들이 생기면서 도전도 모험도 멈췄다. 좋게 말하면 신중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하고 비겁해졌다. 하물며 이번 생에서는 그 결과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고 단지 무한 반복의 삽질만이 약속된 일은 꿈도 꾸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딸에게 그저 핑계만 대며 주저앉아 있던 것을, 세속적인 잣대로 판단하고 재단했던 것을 사과하고 싶어졌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


4. 전문성


랩걸, 호프 자런이 내게 가르쳐준 101가지 중 마지막은 이것이다.


전문성은 무한반복되는 삽질의 결과물이자 누군가의 인정과 지지 없이도 어제보다 더 나은 삽질을 할 수 있는 능력.


"우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문을 두드리는 것도 멈추지 않았고, 언젠가는 그 문들이 열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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