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선릉산책>, 정용준
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인 ‘선릉산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종후보작들 모두 고루 좋았다. 다양한 포지션에서 힘을 발휘하는 작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각각 다른 매력을 지녔기에 어떤 작품이 수상작이 되었어도 상관 없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베스트를 꼽는 건 작품성보다는 취향의 문제일 듯. 나는 권여선 작가의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가 가장 좋았다.
한때 프랑스적인 미래를 꿈꿨던 나는 매우 한국적인 보습 학원에서 전공과는 상관없는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친한 선배의 부탁으로 ‘아이 돌보기’라는 주말 알바 땜방을 하게 되는데, 약속장소에 나가 보니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 보호자와 함께 나와 있다. 음식을 손으로 마구 집어 먹고 아무데나 자주 침을 뱉고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며 드러눕는 자폐청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아웃복서 파피용, 눈에 띄는 나무들의 이름을 모두 읊어대는 ‘한두운. 두 청년의 길고 터프한 산책.
하루 동안의 관계와 심리 변화가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감정적으로 탈진했다가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 마치 내가 얻어맞은 듯 아팠다. 화자 나와 한두운이 ‘바람이 지나가는 곳으로... 투명한 길 하나가 허공 속에 놓인’ 듯한 광경을 나란히 바라보는 장면은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듯.
압도적 미모를 소유했던 한 여고생이 어느 날 밤 공원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여동생과 두 명의 동창생, 사건 용의자의 교차되는 목소리를 통해 차근차근 드러나는 14년 전 살인사건의 전말. 몸짓 하나가 불러온 오해와 비극적 파괴, 그 결과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린 사람들. 남은 가족의 가혹한 애도의 과정을 통해 던져지는 질문. 이유 없이 가혹한 죽음과 삶에도 의미가 있는가,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동력은 일반적으로 ‘후더닛(whodunit)’, ‘하우더닛(howdunit)’, ‘와이더닛(whydunit)’일 것이다. 이 소설의 미덕은 퍼즐조각들을 적절하게 제시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놓치지 않은 채 끝까지 끌고 가는 데에만 있지 않다. 깊이와 디테일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채 인물과 삶을 다룬다. 몇 차례 울컥하고 말았다. 게다가 신선하고 탁월한 비유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소설 읽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이런 건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지. 아직까지는 이 단편이 2018 베스트이다. 작년부터 여러 지면에서 읽어온 권여선 작가의 단편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서 다음 작품집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회사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그는 어느 날 직능계발부로 징계성 발령을 받은 뒤부터 매일같이 강당에서 생산직 교육을 받는 중이다. 그와 함께 좌천당한 사무직원들은 사장실을 점거농성하고 직능계발시험을 거부하는 단체행동을 하지만 달라지는 게 없자 점차 회사를 떠난다. 허나 반복적인 육체노동이 그에게는 크게 모욕적이지도 힘들지도 않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고양이 탐정’으로 유명한 그의 밤은 낮과 마찬가지로 노동으로 꽉 차 있다. 하지만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건, 짭짤한 수입 때문이 아니다. 집 나간 고양이들이 겪을 고통을 그가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의뢰인이 찾아오는데…
하아- 좋다.
다른 감상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냥 좋다’로 충분한 소설.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의미심장해진다. 김금희 작가의 단편을 읽고 나면 매번 캐릭터가 남는다. 무기력해 보이는데 무력하지 않은… 김금희표 캐릭터라 해도 될까. 그 짱짱하고도 유쾌한 힘의 근원은 무엇인지.
평생을 혼자 산 그는 시시때때로 우울감과 알코올에 젖어 자살을 시도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연찮은 어떤 것들, 이 도시가 운영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기척들, 예를 들어 취객이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린다든가, 신문 배달원이 신문값을 받으러 온다든가, 교회를 다니라며 늙은 여자들이 초인종을 누른다든가 하는 일들 때문에 죽지 못하곤 했다. 십오년 전 어느 날에 그것은 길고양이였다. 그가 죽기로 결심한 날에 길고양이가 무슨 영문인지 마당의 쓰지 않는 고무 다라이에 새끼를 낳았던 것이다. 다라이는 다라이라서 그건 쓸데없이 크고 버짐처럼 허옇게 자줏빛 고무 물체가 닳아 있고 더럽게 방치되어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새끼 고양이들이 담겨 있었고 그 고양이들의 처리 문제로 그는 며칠을 죽지 않고 더 살아야 했다. 그 뒤로 또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예를 들어 벽의 못에 노끈을 걸고 목을 매려 할 때마다 그것, ‘다라이’에 있는 그것들이 그의 죽음을 간섭했다. 어떻게 한단 말이냐, 저것들을. 그 간섭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는 며칠을 더 살았고 나중에는 그냥 자기 자신을 고양이에 기탁했다. 어떻게 보면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죽을 수 있는 주체에서 간섭받는 객체로 물러선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양이는 이 괴괴한 단독주택에서 움직이고 먹고 눕고 싸고 울고 할퀴는 유일한 생명체였으므로 고양이에 집중하는 것은 삶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사실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냈다. (p239)
이혼녀로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삼년 째 작은 읍산요금소의 정산원으로 일하고 있다. 요금소를 통과하는 이들은 대부분 요양원과 화장터와 납골당으로 향한다. 어느 날 검은색 그랜저가 요금소 앞에 멈춰 길을 묻는다. 그리고 이십분 간격으로 계속 나타나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매번 통행료로 오만원권을 내미는 낯선 사내. 온종일 ‘요금소’라는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는 이의 불안과 공포.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이야기.
김숨 작가는 일상의 공포를 잘 다루는 것 같다. 특히 익숙한 일상적 공간에 홀로 남겨진 여자(아내, 며느리, 식당여주인 등등)에게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 같은 것. 지루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이상한 곳에 도달해 있다. 일이 터지기 직전, 또는 원인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폭력의 섬뜩한 기미만 남겨 놓고 소설은 끝나곤 한다.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괴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가히 독보적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