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Sep 21. 2018

새벽까지 희미하게

그녀의 마지막 소설


In three words I can sum up everything I've learned about life: it goes on.
― Robert Frost


작년초 별세한 정미경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고 펼쳐들었다. 분명 투병 중이었을 텐데, 이토록 경쾌하게 삶의 황량한 순간을 다루다니.


인물들은 김은숙 드라마에 나올 법한 톡톡 튀는 말들을 맛깔나게 주고받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한 사람은 툭하면 빚잔치를 벌이는 어머니와 정신병을 앓는 아버지, 장애가 있는 동생 뒷바라지로, 또 한 사람은 벌써 몇 년째 암투병 중인 아버지와 망하기 직전인 영세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를 밤낮으로 돌보느라 ‘폭망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허나 이야기는 우울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그 어둡고 황폐한 터널을 지나갔다. 그렇다고 현재 그들이 빛 속에서 랄랄라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란 누가 보고만 있지 않으면 버리고 싶은 짐이라 해도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리 만무하다. 다만 그들은 각각 다른 선택으로- 한 사람은 ‘무한대에 가까운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서,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책임져야할 (일의) 세계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어쨌거나 그 시절을 통과한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빛나던 달빛 같은 순간들. 그 순간들을 징검다리 삼아 어둠을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쨌든, 삶은 계속된다.


(그녀가 쓴 마지막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내가 읽게 된 마지막 작품일) 이 소설로 작가를 기억하겠구나 싶었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서 선글라스를 낀 채로 모과나무를 부둥켜안고 있는 송이와 미끄럼틀 위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유석,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던 두 남녀의 이어지지 않는 대화, 그토록 무거운 속내와 ‘날것의 밑바닥’을 서로에게 드러내던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을 그런 식으로 공유하던 그 차가운 새벽 공기를 오래도록 떠올릴 것이다.


송이는 유독 먼 곳의 얘기, 먼 데 사는 사람 얘기를 곧잘 했었다.

……북극 만년설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은 화가 나거나 슬픔에 사로잡히면 그냥 눈밭 위를 걸어간대요. 무작정 계속. 걷고 또 걷다가 그 마음이 다 사그라들면 그 자리에 긴 막대를 하나 꽂아놓고 돌아온대요. 다음에 가면 그 막대들이 어떤 마음의 깃발인지 기억이 안 날 것 같지 않아요? (중략) 

그 특별할 것 없는 얘기들은 더 이상 송이의 모습을 볼 일이 없어진 후에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오르곤 했다. 시간이 한동안 흐른 후에야 글자가 하나씩 떠올라 문장을 이루는, 어떤 특수 용액으로 쓴 편지와 비슷하달까. (p186)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지나가는 곳으로,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