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베란다 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다. 비가 쏟아졌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기척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빗줄기는 약했다.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서 비가 오는 건지 마는 건지 싶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 난 전형적인 내향성 인간이구나.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했을 뿐인데,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누워 있는 와중에도 몸뚱이의 하중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때 오랜 친구 j가 톡을 보냈다. 오, 나 방금 빗방울 맞았어.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답을 했다. 난 시댁에서 왔다 가셔서 폭풍우 한 차례 지나간 기분. 이윽고 도착한, 팩트가 분위기를 깬다는 메시지.
분위기에 죽고 살며 옴팡 젖어 내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십여년 간 지속되었던 그 시절, 내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 충전되었나. 나는 그때 무얼 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나. 확실한 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그럭저럭 잘 움직였다는 거다. 뭔가 부자연스러워, 나 같지 않아,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의 활력에 기꺼이 나의 에너지를 보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 시절 내내 함께한 친구가 j였다. 우리는 비혼과 결혼이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삶의 방식과 형태가 몹시 달라졌고, 관계는 예전같지 않았다. j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뭔가가 내게서는 서서히 빛을 잃고 사라지기 직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뭘까.
이 시점에서 생각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난 지금 감기와 축농증과 독한 약과 혹독한 날씨에 시달리고 있고 이런 상태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마련. 대신 몇 년 만에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를 책장에서 꺼내든다.
과다한 외부 자극을 피하며, 고요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세상보다는 자신과 접속하기를 기꺼워하며, 낯선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경계심’ ‘차이에 대한 민감성’ ‘복잡한 정서성’을 보이는 사람들.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강하고 근사하게 자라’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게 시들어 버리는, ‘난초’ 같은 사람들.
지나치게 예민하고 까칠하고 수줍음 많고 소심하고 생각 많고 사교적이지 않으니 이래 갖곤 원활하게 사회활동하기 어려우며 세속적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 그런 우려 섞인 조언을 듣곤 하는 사람들.
바로 내향적인 사람들.
나 또한 위와 같은 말을 반평생 들어왔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피로감과 좌절감을 기억한다.
그런 내게 괜찮다고, 너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해준 목소리가 있었다. 부드럽지만 강건하게. 7년간 모은 사례와 연구들로 자신의 주장을 조근조근 펼쳐가며.
나는 아직까지도 이 책의 영향권 속에 있다. 처음으로 내 내향성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줬던 책이었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심신이 지쳐 있으면, 내 기질이 외향적이었다면 사는 게 훨씬 쉬웠으리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비슷한 기질의 아이에게 부정적인 자아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세상 다 산 얼굴로 뻗어 있지 말자. 나는 수전 케인의 평온한 미소를 들여다보다가 책을 덮었다. 몸을 일으켰다. 내 기합이 들어간 동작에 흥얼거리며 수학문제를 풀던 아이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잠깐 충전 좀 하고 올게. 아이는 더는 묻지 않고 으레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인다. 우산 갖고 가라는 아이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되도록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상생활에서 되도록 ‘회복환경’을 많이 만들어두는 일부터 해야 한다.”
걷기에 좋을 정도로 빗줄기는 약해져 있다. 이래 갖곤 j가 실망하겠는걸, 생각하다 걸음을 멈췄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회복환경'. 그건 물리적 공간이거나 시간일 수도 있다. 때때로 사람일 수도... 내게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고 나를 격려하는 이.
그 소란스러웠던 시절, j가 회복환경으로서 늘 함께 했었다는 걸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불현듯 j와 내가 누렸던 다정한 시간들이 생생하게 되돌아와 빗속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