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너무 깊이 몰두하게 될 때
<뉴필로서퍼 한국판: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라는 철학잡지를 구입했다. 순전히 "과도한 자기성찰 금지"라는 컬럼 때문이었다. 목차에서 제목을 발견하자마자 뭐랄까, 머릿속에서 새빨간 경고등이 켜지는 듯했달까. 저자의 손가락이 나를 똑바로 향한 채 이건 너한테 하는 소리야, 외치는 것 같았다.
이 글은, 편집위원 나이젤 워버튼이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을 인터뷰한 것으로, 분량이 그리 길지 않은데도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답변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생각에 골똘해졌다. 평소 당연시해왔던 '자아 성찰'과 '자기 서사'에 대한 생각을 점검해보게 됐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현재 철학자들 사이에서 주류로 형성된 이론은 이렇다. "삶이 서사적이며 과거에 자신이 한 일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통합해서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인간다움이 형성된다"는 것. 이런 주장을 갈렌 스트로슨은 크게 우려한다. 그리고 나를 퍽 심란하게 했던 문제의 문장을 꺼내놓는다.
"과도하게 성찰하는 삶은 아예 성찰하지 않을 때보다 훨씬 해로울 수 있다."
샤르트르가 주장했듯, 자기 서사라는 건 '자기기만'의 심오한 형태이므로.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생각하고 그 기억에 의존할수록 실제 일어난 일에서 더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특정 과거를 소환할 때 등장하는 장면은 바로 이전 버전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가령, 과거의 사건 A를 어느 날 우연히 기억해낸다고 치자. 기억은 완벽할 수 없으니 기억 속 사건은 A-1이 된다. 몇년 뒤 그 사건을 떠올리려할 때, 이제 기억 속 사건은, A도 A-1도 아니라 A-1에 대한 기억인 A-2가 된다. 그렇게 기억의 최종버전은 원래의 사건에서 아주 멀어져 있다.
그러니까 첫사랑에 대해 실망하는 이유는, 그가(혹은 내가) 실제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를 그리워하며 떠올린 횟수만큼 그가 내 기억들 속에서 미화의 과정을 거친 끝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도한 성찰 대신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스트로슨은 이렇게 조언한다.
자신에 관해 자주 생각하면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한다면 차라리 좋은 소설을 읽어라. 그리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라.
그것이 '좀 더 신뢰할 만한 자기 이해의 방법'이다.
나는 이제껏 자기서사작업의 힘을 신뢰해왔다. 스트로슨은 이런 일이 특정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한정시켰지만,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작업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거나 파편화된 자신을 통합시키거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왔다. 내가 제외시킨 건 알흠답고 영웅적인 서사 속에서 자신을 세탁하려하는 소수의 무리였다.
하지만 스트로슨의 지적이 굉장히 뼈아프게 다가왔던 건, 분명 나조차도 방어적으로 내 서사를 재조직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시모에 관한 일은, 내가 주인공인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할 때와 그녀가 주인공인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할 때 전혀 다른 드라마가 되잖는가. 로맨스도 누가 주인공인지에 따라서 쟝르 자체가 달라지듯이.) 일기를 쓸 때조차도 독자를 상정하며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못하곤 한다. (마음을 거칠고도 정직하게 드러낸 글들은 주기적으로 삭제된다.)
자아에 몰두할수록 비대해진 건 자아상일뿐 마침내 자아의 본질을 성찰해내어 내 삶을 드라마틱하고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근 몇 년간의 내 노력이 헛되다고만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어떤 것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스트로슨의 경고를 이해했고 새겨듣기로 했다.
기질적으로 나는 안테나가 저절로 내 자신에게, 내 내면으로 향하는 사람이다. 마치 나침판의 바늘이 어딜 가든 특정 방향을 가리키듯. 어디에서 누구와 무얼 하든 내 주위에 거대한 자기장이 있어서 내 의식이 언제나 그 영향권 안에 있는 것 같다. 백만년에 두세번꼴로 자기장의 방향이 바뀌는 역전현상이 내게 일어나지 않는 한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테지. (과다한 자기 성찰을 피하자고 결심하는 지금도 이렇게 자기성찰이 진행중이다!)
오늘따라 이런 내가 '소설을 읽는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