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미디어 아티스트 조나단 해리스의 테드 강연을 들었다. 그는 ‘We Feel Fine’이라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약 1년 반 동안 진행했는데, 그 핵심은 전 세계의 감정을, 정확히 말하자면 영어권 사용자들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 것이다. 그는 세계 각지의 블로그에서 ‘I feel’ 또는 ‘I am feeling’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문장들을 2·3분마다 검색하여 매일 2만여개의 감정을, 결과적으로 약 750만개의 감정을 수집하기에 이른다. 성별, 날씨, 시공간 등에 따라 세분화되고 계량된 감정들. 그러니까 어제와 달라지고, 어제보다 더 강렬해진, 혹은 한날한시의, 그러나 나와 당신의 다른 감정들……
나는 그가 대형 스크린에 시각화한 감정들을 잊을 수 없다.
색색의 수많은 점들이 마치 반딧불이처럼 어두운 화면 속을 떠다닌다. 긍정적인 감정은 색이 밝고, 부정적인 감정은 어둡다. 감정이 거셀수록 점도 커진다. 무리지어 떠다니며 소란스럽게 와글거린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유기체 같다.
점 하나를 클릭하면 누군가의 내밀한 감정이 문장으로, 때로는 사진과 함께 나타난다. “내 머릿속에 아버지가 너무 커서 진짜 내가 들어설 공간이 없는 것 같다.” “세상이 가면을 쓰길 강요하지만 않으면 내가 좀 더 나다웠을 텐데.” “너무 외롭다.” “너한테 난 투명인간인가 봐.” “산 넘어 외딴 촌동네에 살고 싶다. 내가 좀 예쁘게 느껴지게.”
이윽고 세계지도 위에 점점이 박힌 감정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의 모든 감정이 채집되었다면, 세계는 명멸하는 감정의 빛으로 가득 찼을 터였다. 내가 그였다면, 나는 작은 반도의 허리께에 커서를 옮겨 그 가운데 가장 어둡게 빛나는 점을 클릭했을 것이고, 그 점이 토해내는 말에 귀 기울였을 거다. 그랬다면, 그건 어떤 감정이었을까. 슬픔이었을까, 후회였을까. 수치심이었을까, 분노였을까.
잠언 4장 23절의 말씀을 자주 새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킨다는 건, 감정에 익사하지 않는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 높은 감정들이 나를 덮친다. 대체로 마음의 가장 음습한 데서 서식할 것 같은 감정들이다. 나는 감정을 잡고 억누르고 해치고 이기려 하나, 감정에 지고 사로잡히고 떠밀리고 휩쓸리고 휘둘린다. 감정은 단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유기체 같다. 내 안에서 발생하나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한다. 나와 팽팽하게 맞서 그 힘을 겨루는 상대이며, 나는 그와의 싸움에서 번번이 지고 만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다는 말씀이 있다.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한 그 생기가 감정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서…
살아 있다.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내 감정들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어느 밤하늘을 올려보던 중에 조나단 해리스는 21세기의 별자리는 무엇일런지 의문을 품었다고 했다.
"만약 별자리들이 2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이름이 뭘까? 무슨 이야기를 담게 될까?
하늘에 지금 새로운 별자리를 만든다면 어떨까? 오늘날의 신화라 부를 수 있는 건 뭘까?"
그리고 이런 문장으로 강연을 끝마친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별자리로 그려졌을 때 어떻게 보일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강연을 들은 그날밤, 나는 깊고 어두운 허공에 나만의 별자리를 새겨 놓았다.
때때로 아득한 어둠 속에 몸을 누인다. 감정들은 거대한 창공에 별처럼 박혀 있다. 유쾌하게 사지를 놀리는 ‘열정’과 고요하게 웅크린 ‘수줍음’, 잠든 아이의 속눈썹처럼 가지런한 ‘평온’과 거미줄처럼 얽힌 ‘짜증’, 안개처럼 스며든 ‘우울’과 짙게 덩어리진 ‘치욕’, 사방으로 날선 ‘적의’와 한 점 빛으로도 주위를 압도하는 ‘긍지’ 같은 것들. 이 모든 감정의 별자리들을 올려다본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인간적인 그 빛들을.
어느 하나 빠짐없이 선명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