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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11. 2019

6. 설치미술가 안규철

지난날과 해후하는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는 지갑 속에 청년시절의 당신 사진과 부부사진을 넣고 다니신다. 사진 속 모습은 곤혹스러울 만큼 어리다.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얼굴로 웃고 있다.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깝달까.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눈이 까맣고 볼이 발간, 영락없는 소녀다.  흑백으로 새겨져 있으나 숨길 수 없는 광채로 빛나는 얼굴들. 부부사진은 아마도 첫 데이트 때 찍은 걸로 기억하는데, 카메라를 바라보는 얼굴이 조금 굳어 있어 서로를 향한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열기, 혹은 설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있다. 그날의 엄마는 고개만 돌려도 아버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몇겹의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아버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얼굴은 일면 차분해 보이나 사실은 가슴 깊이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밀착이야말로, 그들이 필연적으로 평생을 함께할 인연이라고 선언한다. 

illustrated by inyoung.kong


  언젠가 공항 로비의 한 카페에서 아버지와 아버지 지인들과 차를 마신 적이 있다. 어떤 이야기 끝에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그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봐봐, 잘 생겼지, 응? 얼마나 풋풋해!” 각자의 가족을 오래 봐온 친구들은 한마디씩 말을 보탠다. “아니, 제수 씨 어린 것 좀 보게.” “이렇게 어리고 예쁜 형수님을!” “이 친구야, 마나님 평생 받들고 살아.” 왁자지껄 웃고 떠들다가 어느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든다. 지갑에서 나온 건 수십년의 시간으로 물들고 귀퉁이가 해진 사진들. 그들은 열정 어린 몸짓으로 오래 전 청춘을 서로에게 건넨다. 평균 나이 아마도 일흔. 자기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소년 또는 청년의 모습을 자랑하듯 한탄하듯... 테이블 위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던 그날.


  내게도 곧 당도할 것이다. 


  “거울 앞에서 불현듯 자신이 이미 벽돌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날이.

  “원래 모습과는 다른 형태와 기능 속에” 지내왔던,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여백” 같은 날이.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안규철은 예술가의 창조적 마인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의 책,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에서 ‘사물로서의 새로운 삶, 또는 새로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먼저 사물이 된 나무의 운명을 말한다. 나무는 나무로 오래 살아 왔기에 책상이나 의자로의 변신이 마뜩치 않다. 나무의 의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원래의 형태를 잃고서 전혀 다른 사물이 되고 만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자신이 애초의 모습과는 상관없는 모습이 되어 있음을 당혹스러워하며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상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대부분이 이런 상태에 있다. 그것들은 먼 곳에서 뿌리 뽑혀 이곳에 왔고 원래 모습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형태와 기능 속에 강제로 앉혀져 있다. 그것들은 긴 침묵 속에서 사물로서의 새로운 삶, 또는 새로운 죽음에 적응한다. 우리는 사물들 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그들의 체념과 그리움과 원한을 기억해야 한다. 사물들에게도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여백을 남겨주어야 한다. (p35-37)”


  하물며 사물들에게도 그러할진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죽음’을 담담하게 통과하여

  우리의 부모로서 살아온 그들에게도, 

  아직 아무것도 강제되지 않고 어떤 것으로도 변형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여백을 남겨주어야 한다.


  그날의 공항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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