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독일 기숙사 플랫 생활기
März 20, 2012
오늘은 저녁 8시부터 플랫미팅을 한댔는데, 6명 전원이 한자리에 모인 것인 이번이 처음이다. 내 옆방에 뉴비로 아일랜드 훈남 크리스가 새로 왔는데, 그가 쓸 찬장이 없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잉(Ying)이 모두의 방을 노크해서 이런 일이 있다고 알리고, 회의를 소집했는데 웬일로 모두가 순순히 참석을 했다.
우리는 6명이 살고 있는데, 부엌 찬장도 6개가 구비되어있건만 그중 하나를 공용으로 냄비 놓는 공간으로 써서 크리스가 쓸 찬장을 배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원칙대로 찬장을 크리스에게 내어주고, 공금으로 선반을 하나 더 사서 공용 냄비들이랑 그릇을 선반에 놓기로 했다. 이런 합의를 도출해내기까지 여섯 명이 모여서 진지한 표정으로 '선반이 얼마 정도 하더라?', '우리가 얼마씩 내야 되지?' 막 이런 얘기하는데 둘러보니 나만 여자다. 이 상황이 너무 웃기다고 느껴져서 혼자 빵 터져서 웃었는데, 웃긴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서 애들이 나땜에 웃었다. (글로벌 웃음거리인가...)
그리고 다음 안건은 '식탁 청소 잘하기', '설거지 제발 미루지 말기'. 누군가가 설거지 더미에서 fly를 봤다고 했는데 나는 딴생각하면서 못 듣고 있다가, '뭐 무슨 벌레가 나왔었다고?" 하면서 경악했더니 애들이 또 날 보고 웃었다. 우리 플랫은 부엌 냉장고에 일주일마다 돌아가면서 각자 해야 할 집안일이 표로 정리되어 붙어있다. 재밌는 건 돌아가면서 쉬는 주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lucky week라고 부른다. 이 표는 내가 기숙사에 배정되었을 때부터 있었고, 우리는 초기에 같은 방식을 사용하자고 합의했고 매번 새로운 표를 잉이 주기적으로 만들어 붙인다. 누군가가 길게 플랫을 비우는 경우, 집안일에 공백이 생겨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기 때문에 긴 공백이 생기는 경우 미리 플랫 메이트들에게 말해둔다. 우리 플랫은 쓰레기 버리기, 화장실1청소, 바닥청소, 부엌 청소, 화장실2청소 집안일이 있고, 자신이 요리한 부엌과 식탁은 직접 치우는 게 원칙이다.
마지막 안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냉장고 청소였다. 이미 한번 한 적이 있어서, 이번엔 또 얼마나 냉장고를 다 뒤집을지 걱정이 되었다. 냉장실은 각각 한 칸씩 사용하고 있고, 냉동실은 함께 쓰고 있는데 이 플랫에 온 이후로 냉장고가 깔끔하게 유지된 적이 없었다. 냉동식품을 많이 먹어서, 냉동실은 항상 가득 차있고 냉장실은 안 먹어서 버려야 하는 음식으로 빈자리가 없다. 청소를 해야 하는 상태이긴 한데, 제일 거대한 집안일이라 다음에 날 잡아서 하고 싶었다.
애들은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이미 냉장고 전원을 끄고, 냉장고에 있던 모든 식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애들을 말렸다.
"I think it's clean... isn't it? isn't it? isn't it?"
쿤레가 듣고는 빵 터져서 청소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란다... 깨끗하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응 그래... 나 청소하기 싫어.
냉장고 안의 모든 선반과 서랍을 씻고 닦고, 냉동실도 똑같이 하고, 냉동실에 많이 생긴 얼음까지 다 제거하고 나니 부엌은 물바다가 되었다. 물바다가 된 부엌 청소를 하고, 심지어는 냉장고를 들어서 위치를 옮겨둔 다음 바닥까지 닦았다.
얘들아...... 그렇게 깨끗한 게 좋으면, 평소에 비누나 좀 사. 화장실에 비누가 없어서 맨날 나만 사 오거든? 이 밤에 냉장고를 들어서 청소하다니, 가본 적도 없지만 마치 내가 군대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냉장고 청소를 화장실 청소하는 고무장갑으로 하려는 잉을 보고, 내가 경악하고 차라리 나의 새 고무장갑을 건네줬다. 2시간 동안 부엌에서 계속 청소 중인데, 오늘은 그냥 청소의 날 인가보다. 그래도 꽤나 협조적인 플랫 메이트들 덕에, 한동안 엄청나게 깨끗한 냉장고를 신나게 사용할 수 있겠다.
이날 회의에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미스터리 한 난제는 모두가 열심히 맡은 구역을 청소하는데(=한다고 주장하는데), 거의 이틀 만에 플랫은 청소하기 이전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얘들아 범인 꼭 찾아내자 다음 회의 때는...
2019.5.26
독일에서 6명의 플랫 메이트가 욕실 4개와 주방 겸 거실을 공유하는 기숙사에 살았다. 사실 flat은 영어로 된 표현이고 독일에서는 WG(붸게) 라고 부른다. 우리 기숙사의 모든 방은 구성이 다른데, 다른 방은 방 4개 욕실 1개를 공유하거나, 방 8개 욕실 4개를 공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건물인데 이렇게나 다양한 조합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국대학교 기숙사에서는 4인 1실에 침대도 1층은 책상이고 2층 침대인 형태로, 방 내부 공간이 정말 좁았었다. 방 안에서는 도저히 활동할 공간이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사 휴게실이나 학교도서관 아니면 외부 카페에서 보내다가 잠만 자러 기숙사에 가는 생활이었다. 그러다 보니 독일에 도착한 첫날에는 내가 배정받은 기숙사가 넓은 방이 6개이고 부엌도 웬만한 가정집 부엌보다 넓다는 게 꽤나 충격이었다. 내가 그 플랫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플랫 메이트로 누가 올 지 기대와 걱정을 하면서 며칠 동안 인기척도 없는 빈방으로 가득한 플랫에서 혼자 지냈다.
며칠 뒤 저녁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는데 큰 캐리어를 끌고 지친 모습의 두 명의 남학생이 서있었다. 한 명은 중국인 친구 잉, 한 명은 나이지리아에서 온 쿤레라고 했다. 영어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통성명과 출신 국가를 확인하는 인사를 마치고 내가 말했다.
"반가워. 근데 너희가 배정받은 룸넘버가 여기가 맞다고? 아마 아닐 거야."
나는 두 명의 남학생이 왜 나랑 같은 호수에 배정받았다고 주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경계했다. 쿤레는 답답했는지 서류를 꺼내서 보여줬다. 그들의 주장대로 서류에도 이 방에 배정받은 게 맞았다. 긴 여정으로 지쳐 보이는 그들은 각자 방에 큰 캐리어를 놓고 짐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하우스 마이스터(기숙사 관리인)에게 이 모든 것이 착오가 아닌지 따지러 갔다. 하우스 마이스터 할아버지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눈빛으로, '이 기숙사의 모든 방은 성별과 상관없이 배정돼.'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한국에서도 독일학교에서도 이런 안내는 받은 적이 없어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Is it normal in Germany?'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응, 완전히. 네가 여학생만 사는 기숙사를 기대했다면, 공공 기숙사는 아예 그렇지 않으니 사설 여성전용 기숙사 같은 데로 갔어야 해.'라고 답해줬다.
그렇게 그 이후에 우리 플랫에 온 모든 플랫 메이트가 다 남학생이었고, 나는 압도적인 성비의 플랫에서 중국, 아일랜드, 독일 Basel, 나이지리아, 슬로 베이나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1년간 지냈다. 가끔 플랫 메이트가 샤워타월만 두르고 방에 가는 길에 인사를 건네거나, 여자 친구를 데려와 일주일을 함께 지내거나, 금요일 저녁마다 본인 방을 클럽으로 만들어서 앰프를 켜서 놀다가 12시가 넘어서는 진짜 클럽으로 가는 경우에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일어로 오는 모든 행정문서를 대신 읽어주고, 독일어로 전화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도와주고, 다치거나 아픈 날은 가족처럼 돌봐주었던 착하고 상냥한 친구들이었다.
독일에는 쯔비쉔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2-3달 동안 기숙사나 플랫을 비우는 경우 짧은 기간 타인에게 쯔비쉔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 기숙사에 살았지만, 플랫 메이트가 3달 정도 인턴십이나 여행을 가서 쯔뷔쉔으로 타인에게 방을 양도한 경우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학생이 아닌 임시거주자가 함께 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정체모를 슬로베니아 사람은 대체로 이상했고, 그 뒤로는 한 달 동안 쾰른에서 온 쾌활한 친구랑 대화를 많이 한 적도 있었다. 함께 사는 구성원부터 생활 방식까지 한국과 너무 다른 기숙사였지만, 척박한 독일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자 home이 되어 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