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쩌다 보니 업무일지
15.02.2012 Mi.
우리 팀은 아침마다 10분 미팅을 한다. Boss의 투명한 방에 의자를 끌어다 옹기종기 모여서 어제 한 일과 오늘 할 일, 보스와 상의해야 할 이슈를 얘기하는 시간이다. 보통 각자 1,2분 이내에 끝나고 보스가 코멘트를 하거나 문제가 있는 경우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 시간이 나에게는 '독일어 듣기 평가' 시간이다. 독일어를 하는 독일 사람 그리고 독일어를 하는 소수의 프랑스 사람 사이에서 섬처럼 고립된 영어를 하는 한국인이라니. 매일 아침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모두의 브리핑을 듣는다. 내 차례가 되면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사용언어가 영어로 바뀌어서 보스와 얘기할 수 있다. 내가 일하면서도 신기하다고 느끼는 것이 팀 회의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 있음에도 동료들(할아버지, 할머니 동료들도 계시는데 나를 일상적으로 대해주신다.)이 불편해하지 않고, 신기하게도 톱니바퀴처럼 팀은 잘만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인지 궁금해진다.
한국에서처럼 심심한 인턴이 될까 봐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7시간 근무하는 동안 잡담 한번 없이 커피타임 한번 없이 얄짤없이 일만 했다. 퇴근 5분 전 까지 일하고 기차 시간에 맞춰서 30초 만에 컴퓨터를 끄고 기차 타러 뛰어간다. 아주 피곤하지만 전 세계에 있는 자동차 회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일이라서 너무 재밌다. 그리고 인턴인데도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할 만큼의 유의미한 일들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제 겨우 출근 한 지 2주차인데도, 나는 우리 팀에서 유일하게 이 일을 맡고 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보스에게 일을 받아서 진행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구글 채팅으로 물어본다.
회사에서 구글 앱스를 쓰는데 좋은 점이 참 많다. 구글 드라이브로 문서를 공유하고 있어서, 보스가 바로 피드백을 적어주고 공동작업도 가능하다. 서식에 맞춰야 하는 문서가 아닌 경우 색깔도 바꾸고 삭제도 하면서 이렇게 써도 되나 할 정도로 막 쓰고 있다. 행정병을 하는 친구들이 마우스 없이 한글문서 서식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게 맞나 싶다. 지메일을 써서 좋은 점은 메일 내용이 자동으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체코 클라이언트가 체코어로 답장을 보내서 황당해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헬레나 아주머니가 번역해서 영어로 보면 된다고 안심하라면서 알려주셨다.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 '스마트하게 일한다' 뭐 그런 말이 유행하는데, 스마트하다는 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싶다.
모두의 퇴근 시간이 다르다. 야근을 하는 직원도 있지만, 나처럼 35시간 일하기로 했다면 7시간 일하고 집에 간다. 게다가 야근을 했다면 다음날 근무시간을 줄여서 한 주에 35시간을 알아서 맞춰 일하면 된다. 그래서 오후 3시부터는 가끔 가다 '츄스'하고 인사하고 가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난다.
계속 지켜봤는데 독일 사람들은 대체로 열심히 일한다. to do list 가 명확하다. 회사에서 개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개인 휴대폰이 없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업무시간에는 책상에 놓인 회사 전화만 쓴다. 너무 궁금해서 업무시간에 핸드폰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도 업무 중에는 회사 전화로 연락받을 수 있게 해두었다고 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회사 명함에 각자의 회사 전화번호만 있고 개인 휴대폰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지?
이 사람들은 개인의 생활과 회사에서의 생활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개인 휴대폰으로 회사에 있지 않은 시간에 회사일로 연락을 받거나, 클라이언트의 전화라도 받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회사 전화번호만 써있다는 것은 업무에 관한 연락은 그 사람이 회사에 있는 동안만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휴대폰 번호 없는 명함은 잘못 만들어진 명함이나 다름없는 한국과 너무 달라서 이해하는 데 꽤 어려웠다. 대신 이 사람들은 가족들의 연락도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회사 전화로 해결한다. 회사 번호로는 언제 중요한 전화가 올 지 모르니 꼭 필요한 얘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인 휴대폰으로 꼭 통화해야 할 일이 있으면 멀리 나가서 따로 받고 온다. 사무실이 오픈스페이스이니 방해될까 봐 그런가 보다.
내가 맡은 일은 국제전화비 걱정 없이 전 세계에 전화하는 것이다. 독일만 빼고 나머지 국가에 모두 전화한다. (독일 전화번호로 전화하면서 영어로 말하면 독일인들이 당황해할 거라서, 독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보스가 나를 뽑은 주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나는 특히 중국과 한국의 자동차회사가 왜 매번 연체를 반복하는 지 알아내야 할 미션을 받았다. 보스와 독일인 동료들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아예 연락이 안되고, 한국은 매번 연체를 반복하면서도 어떠한 설명이나 변명조차 없어서 둘 다 매우 예의 없다고 했다. 연체를 하는 것이 국가적? 문화적? 특징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원래 너의 나라에서는 연체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 물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괜찮지 않다고 말했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회사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진땀 나는 순간이었다. 보스는 앞으로 내가 모국어로 대화를 시도하면 훨씬 나아질 것을 기대했고, 중국은 중국어로 시도해볼 것을 기대했다.
한국회사의 invoice를 보고 invoice에 적힌 대로 전화를 걸어봤다. 여태 연락이 안되었던 것이 당연하다. 자동차 부품 invoice에 고객 서비스센터 전화번호를 써놓다니... 회사 대표전화를 직접 네이버에서 찾았다.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대고, 내가 원하는 부품대금 결제를 담당하는 팀을 내부에서도 잘 찾지 못해서 담당자를 찾아내는데만 하루가 걸렸다. 여태까지 이 일을 한국말도 못하는 독일인들이 영어로 전화를 걸어서 시도했을 생각을 하니 내가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아침 11시가 넘어서 전화하려는데 보스의 우려와는 달리 역시 한국회사는 전화를 받았다. 8시간의 시차가 없는 것처럼 일하지 말라구 ㅠㅠㅠ 왜 유럽과의 시차를 극복하면서 일하는 것이냐고...!!!
독일 사람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한다. 한국이 저녁 7,8시인데 집에 안 가고 니 전화를 받고, 계속 답장을 한다면서 여기서 계속 뭔가를 보내면 대체 언제까지 답장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어쩌지 내가 또 내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름없는 한국의 회사문화(?)를 설명을 해야되나? 일을 오랫동안 하지말고, 제대로 하고 정해진 시간에 집에 가면 좋겠다. 어휴 답답해 :(
2015.11.27.금
국제전화비 걱정없이 저만큼 각국에 전화할 일이 다시 있을 지 모르겠다. 스물 한 살이었고, 많은 것을 몰랐으며 몰라서 용감했다. 교환학생 면접에서 내 토익점수는 700점이었고, 점수가 이렇게 낮은데 가서 잘 지낼 수 있겠냐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얼마나 영어를 못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당시엔 얼결에 영어 면접을 봤고 지금생각해도 신기하게 영어로 일을 하고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영어 면접을 볼 일이 있었는데, 당시 일했을 때보다 더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준비하고 결국 인터뷰도 훨씬 못 봤다. 그 때는 영어를 잘 해야지 하는 생각없이 생존을 위한 의사소통을 하는 중이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성취감이 있었는데, 돌아와서는 괜히 스스로도 좀더 정확하고 유창하게 해야지 하는 욕심이 커져서 오히려 압박이 되고 있다. 원어민이 아닌 조건에서는 누구나 영어를 학습한 사람이고,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나 나나 같은 처지이니 주눅들거나 부담갖지 말자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다.
혹시라도 영어로 일하는 것이 아주 어려울 것 같아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토익 700점에 독일에 가기 전에는 한국 밖을 나가본 적 없는 한국인도 6개월동안 큰 사고(?) 치지 않고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니 조금 더 용기를 내고 부딪혀도 괜찮다고 응원해드리고 싶다. 구글링과 함께라면 내 능력 이상의 일들을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