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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nger Mar 11. 2016

타국에서 산다는 것(1)

7. 외국인의 슬픈 하루

03.02.2012 Frietag


첫 출근 4일 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일주일 동안 입원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왜 입원을 하게 된 건지 듣는 도중 전화가 끊기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던질 뻔했다.

공유기와 인터넷전화기를 모두 초기화시키고, 다시 겨우 신호를 잡은 다음에야 엄마랑 제대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의 엄마는 길게 통화도 못 할 정도로 많이 아픈 것 같다.


나는 검사하고 나면 별 일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고, 엄마도 이왕 병원에 왔으니 완전히 나아서 가겠다고 씩씩하게 말하고 끊었다.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속상한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이 와중에 동생은 제일 춥다는 때에 훈련소에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엄마 옆에 달려가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엄마가 정말 심각하게 아프신 거라면 난 어떡해야 하지?', '돌아가야 하나? 지금 당장 한국행 비행기표를 찾아봐야 하나?'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나는 혼자 아파버려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와 있다. 이런 내 상태도 좀 위험하다고 느껴져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무작정 문자를 해서 속상하고 말했다가 걱정하는 친구의 전화에 한바탕 울었다.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이 곳의 나에겐 쌓인 일이 많았다. 보험회사에서 내 계좌에서 보험료를 알아서 자동이체해가지 않다가 왜 갑자기 한꺼번에 몇 달 치를 내라는 것인지 알아봐야 하고, 결국 보험료를 내라면 내야 한다.

잘 받고 있던 주정부 장학금도 못 받아서 확인해야 하고, 재학증명서도 떼야한다. 3일 뒤에는 출근을 해야 하고, 마음은 지금 한국에 있더라도 몸은 독일에 묶여있다.


아마도 이상한 여자처럼 보였겠지만 U반에서 울면서 학교로 향했다. ISO(International Student Office)에는 겨울학기를 마치고 가려는 학생들이 너무 많았고, 덕분에 너의 민원은 너 스스로 해결하라는 독일식 대답만 듣고 돌아왔다. 한두 번 들은 얘기가 아니다. 어제도 들었고, 이번 주에만 몇 번째 들은 얘기인데 오늘은 내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네가 알아서 하란 그 얘기가 너무 서운했다.


빌어먹을 모든 공지사항을 독일어로 보내 놓고서 '공지 못 봤어?'라고 되묻는 어처구니없는 사람들!!!

그래도 난 외국인 학생인데, 등록금 내는 게 언제까지인지 영어로 안내해줬어햐 하는 거 아닌가? 등록금을 안 냈다고, 재학 증명서도 못 떼게 해놓고 인터넷으로 출력할 수 있는데 왜 아직 몰랐냐니... 아무도 나에게 얘기해준 적 없는 얘기들이라구...


학교 일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주는 내가 우리 flat의 화장실 청소 담당이라서 집에 가서 청소도 해야 한다. 이제 출근해야 하니까 6개월 동안 사지 않아 없던 거울도 사고, 생필품을 사고, 지긋지긋한 생수들을 짊어지고 (수돗물이 석회수라서 생수를 먹거나, 브리타 정수기를 써야 한다.) 마트에서 집에 가기 위해 늘 타던 S1를 탔다.


어깨가 아파오는데 왜 아직도 집에 도착을 안 하나 하고 있는데 이번 역은 'Feuerbach'란다. 직감적으로 내가 눈 앞에 있는 열차를 아무거나 탔던 것임을 깨달았다. 집과는 상관없는 방향의 처음 내려보는 역에 내려서는 생경한 역의 풍경을 마주하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또 눈물이 났다. 괜찮은 척 온갖 일을 보고 들어가는 길이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나 보다. 시내 외곽에 있는 역이라서 그런지 아시아인도 별로 없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까만 머리의 까만 눈동자의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에 띄었고, 그들보다 작고, 소수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오늘은 아예 혼자였다. 게다가 울고 있었으니 날 쳐다보는 게...그래 당연한 거겠지.  


집에 와서는 보험회사에 두 번 넘게 전화해서 담당자는 꿋꿋이 독일어로 말하고, 나는 영어를 하는 미친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보험회사 직원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그래서 다행히 해결은 했지만 내가 일관되게 영어로 얘기하는데도, 독일어로 '너 독일어 못 해?'라고 다그치던 직원. 오늘따라 어딜 가나 반복되는 이 상황이 얼마나 싫은 지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내 머리는 아침부터 멈춰 있고, 마음은 한국에 가있는데, 몸은 하루 종일 움직였다. 수 만 가지 생각이 나는데, 제대로 된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이 먼 곳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었다. 이제야 엄마 손이 조금 덜 가는 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밥도 할 수 있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널고, 개고, 맛있는 것까지 조금 할 줄 아는데. 그런데 아프면 안 되지 엄마.  



2016. 03. 11. 금요일


바로 이 사건이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 계기이고, 지금도 선뜻 다시 타국에 나가 일하겠다고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독일은 겨울에는 8시간, 여름에는 7시간의 시차가 존재해 아침과 밤, 아침과 낮, 낮과 밤으로만 서로를 만날 수 있고, 한국에서는 직항으로 비행시간만 11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위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도 내가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으로 내가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했다. 또한, 타국에서 산다는 것. 특별히 타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일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는 것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 이 무게를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예정된 시간을 마치고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와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표현하던 나라를 '헬조선'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그래도 차로 갈 수 있고, 비행기로는 비교도 안되게 가까운 좁은 땅에 같이 살고 있으면 위와 같은 마음 아픈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하며 위안 삼았다. 그런데 한국에 살아도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 올라와 일하는 친구들이 많고, 심지어 한 집에 살아도 모두들 늦은 밤 귀가해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기 조차 쉽지 않다. 물론 비상상황에는 외국에 있는 것보다는 멀리있고 이렇게 바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있는 게 더 낫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일상이 비상상황 아닌 가 싶을 정도로 너무 팍팍해졌다.        


타국에 산다는 것의 무게를 알면서도, 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의 무게 역시 만만치가 않아 내 마음속에서는 다시 둘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해외에서 취업하고 타국에서 삶의 기반을 잡고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는 내 또래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타국에서 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것들도 빠짐없이 고려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런 마음에 조금은 슬펐던 하루를 공개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기서도  야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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