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엄마를 부탁해
24.02.2012 Frietag
나는 그다지 다정한 딸이 아니다. 장녀라서 그런 지, 씩씩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서인지 살가운 딸은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독일에 오기 전 '엄마를 부탁해'를 읽지 않았다면,
인턴을 하느라 돈을 벌고 회사생활해보지 않았다면,
이 곳에서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보지 않았다면,
기숙사에서 혼자 응급실에 실려가 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오늘 엄마가 나에게 묻지 않았다면,
나는 그 전처럼 내 생각만 하면서 나의 젊음이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 여기면서, 1년 동안 태연하고 즐겁게 독일에 있었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최종 선택은 내가 하고, 그 책임도 내가 지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나름 독립적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나의 독립적인 면은 조금만 삐끗해도 '이기적'이란 단어로 변하기 쉬웠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는 이기적인 못난 딸내미였다.
엄마랑 통화를 하다 얘기 끝에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라고 물으셨다. 그동안 엄마가 이미 정답을 알고 계시면서, 나의 의견을 물어보는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엄마가 정말로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질문을 한 것이다.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 순간에 나는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느꼈다. 21년 동안은 내가 엄마에게 기대서 살아왔는데 오늘 엄마가 그 추를 반대방향으로 조금 움직였다.
어느새 나는 엄마에게 딸이고 친구이며 상담자이자 엄마의 또 다른 꿈이고, 너무나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위한 안내자가 되었다. 이렇게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마냥 어린애처럼 아직도 엄마가 모든 답을 알고 있고 다 해결해 줄 것처럼 믿고 엄마에게 더 바라고만 있었다.
한국에 가야겠다. 엄마를 만나서 위로하고 안심시켜 드리고 싶다. 우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출국 직전 하려 했던 유럽 여행 계획 줄이는 것쯤이야...
내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그저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효도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앞만 보면서 달리다가
엄마, 나 이만큼 했어? 봤지? 보고 있지?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뒤돌았을 때, 엄마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눈 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의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영원한 헤어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주일 동안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내 한 달치 인턴 월급에 해당하는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곧 볼 수 있다.
2016.03.11 금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한 가족이 난데없이 엄마를 잃어버리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결국 엄마를 다시는 찾지 못하고 끝난다. 너무 슬픈 내용이었지만, '소설이니까'라고 말하고 덮을 수 있어 다행인 책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타국에서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엄마를 잃어버리는 일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엄마는 막내인 아들이 추운 날 군대에 가고 나니 딸의 빈자리까지 눈에 보이고, 집안이 텅 빈 모습을 보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다. 한국에 가서 일주일 동안 훈련을 마친 동생도 면회하고, 6개월 만에 내 얼굴을 확인한 뒤로 엄마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독일에 돌아와서 내 마음은 확고해졌다.
독일에서 계속 남아 교환학생을 하던 독일학교에서 학사를 마칠까, 아니면 한국에서 마지막 학기를 빨리 마치고 다시 유럽으로 나올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족들을 만나고, 특히 엄마가 마음이 편해지면서 몸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내 고민이 이기적인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시 돌아와 독일에 있던 게 오히려 꿈같이 느껴지는 요즘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고민을 슬금슬금 다시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나의 젊음이 오롯이 나의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나의 것이다. 세계적으로 일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라고 나를 키우셨으면서, 막상 떨어져 있으면 오만가지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수록, 고민이 깊어진다.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손 잡을 수 있는 곳에 함께 할 때는 화상통화에서는 찾을 수 없던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 알 수 없는 힘의 강력함을 알기에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쉽사리 결정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