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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nger Feb 07. 2016

여기서도  야근합니다.

6. 매뉴얼을 좋아하세요?

16.02.2012 Don.

집에 오니까 아홉 시 반이다. 배고프고 기운 없다. 야근 없는 걸로 유명한 독일인데, 어제, 오늘은 야근이란 걸 했다. 게다가 낮 시간엔 할 일없어서 무료하기까지 했는데, 남들 다 퇴근하고 내 일이 시작되었다. 더 슬픈 건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딱히 하소연도 못하겠다. 7시간만 일하기로 해 놓고 10시간 동안 회사에 있다니! 다음에 일이 별로 없는 날 일찍 퇴근해야겠다. 


나의 주된 업무는 클라이언트에게 연체대금을 공지하고 대금결제일을 확정받고 이에 필요한 증명서류를  주고받고, 계속 메일 보내고 전화하는 일이다. 슈테판이 하던 일이었고, 슈테판은 영어를 잘하던 편이라서 이 일을 배워서 넘겨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cash flow 일, 월, 분기별로 마감을 하는 또 다른 독일인 인턴 친구가 학교로 돌아가는데 내가 입사했을 때 그는 휴가 중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이후로 나에게 일을 인수인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제부터 계속 늦게 끝나고 있다.


이 일의 핵심은 cash flow를 기록하고 왜 돈이 들어왔고, 왜 돈이 나갔는지 이유를 찾는 것인데, 실제로  돈을  정산하는 헬레나 아주머니가 6시쯤 마감하고 정산결과를 넘겨주고 집에 가셨다. 그래서 배워야 할 일을 그때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은데 큰 문제가 생겼다. 거래 이유들이 대부분 '독일어'로  기록돼있다는 것이다. 영어로 바꿔도 어려운 단어들이라서 독어사전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자동차 부품을 너무 몰라서 도대체 뭘 만들어서 돈을 받은 것이고, 부슨 부품을 샀다는 것인지 쓰여 있는데도 모르는 까막눈이라는 것도 문제다. 사전을 찾아도 부품이름 같은 건 없다.ㅠㅠ 


이로써 나는 두 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게 뭐야 ㅠㅠㅠ

여러 나라 말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두 명이 하던 일이라니...

더 무서웠던 건 보스는 내가 퇴근할 때까지도 퇴근 안 했던데(회사 전체에서 보스만 남아있었다.)... 집에는 가시는 건지 궁금하다. 진짜 엄청난 워커홀릭인가 보다. 


그래도 오늘 나에게 일을 가르쳐 준 친구가 친절하게 가르쳐줘서 나도 최선을 다해서 배웠다. 비록 그 친구가 영어로 설명을 못해서 서로가 아주 많이 답답했고 구글 번역기를 너무 많이 써서 거의 컴퓨터와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그 친구는 자기가 영어를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연신 Sorry를 외치면서  미안해했다. '내가 독일어 할 때 그 친구도 똑같은  느낌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여기는 독일이다. 여기는 독일이고, 독일어로 일을 못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거다.'라고 그 친구에게 얘기해줬다. 다행히 내 마음이 조금은 전달이 된 것 같았다. 


이 모든 일들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도록, 친구는 배우는 모든 과정을 스샷으로 남기고 그걸 인쇄해서 내가 이해한 대로 필기해서 보관하는 작업을 같이 해주었다. 그 친구 역시 이렇게 일을  인수인계받아서 엄청나게 두꺼운 업무 매뉴얼 파일을 갖고 있었다.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알았다면 그 파일을 그대로 나에게 넘겨주고 일만 가르쳐주면 됐을 텐데, 내가 독일어를 못해서 그 자료는 보관만 하고 내가  알아볼 수 있게 새로운 매뉴얼을 만들어야 했다. 책임감 있게도 이 친구는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이해했는지 물어봐가면서 작은 것 하나도 다 스샷으로 찍어서 남겨둬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너무 고맙고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자기 역시 이렇게 인수인계를 받았고 인턴처럼 계속 담당자가 바뀌는 일들은 이렇게 매뉴얼로 만들어 둔다고 설명해주었다.  


독일은 회사든 공공기관이든 가정이든 어마어마한 양의 파일을 보관하고 있다. 파일덕후인 독일 사람들은 '책장 = 파일꽂이'로 인식될 정도로 종이로 된 모든 문서를 모아 정리해 둔다. 가장 대표적인 파일덕후 스러운 모습은 은행에 우리나라와 같은 통장이 따로 없고, A4용지에 거래내역을 인쇄할 수 있는데 그것을 파일에 철 하면 그게 곧 통장이 된다는 사실이다. 2000년 하고도 12년이 지난 2012년에 파일에 종이를 모으는 예스러운 방식은 정말 적응 안되고, 귀찮은 일이었다. 인터넷 뱅킹도 하면서, 통장은 왜 없는지 외국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도 모든 문서들을 파일에 넣어두라고 무려 교환학생 OT시간에 주요 주의사항으로 말해주었다. 독일에 와서 한 번도 좋다고 느낀 적 없었던 방식이었는데, 이번 만큼은 정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일하느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파일과, 파일을 꽂을 공간이 필요했던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최선을 다해서 배웠지만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나 혼자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독일어를 못하고, 영어도 독일어보다 나은 것이지 여전히 어려운데, 이 일 정말 괜찮은 걸까? 혹시라도 내가 실수해서 큰 문제가 생길까 봐 좀 걱정이 되는데, 사고 치기 전에 보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의논을 해봐야겠다. 


2016.02.07 일요일 


독일의 파일사랑은  그곳에 있는 1년 내내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였지만, 업무 매뉴얼만큼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저런 방식으로 일했기 때문에, 학생이지만 꽤 주요한 업무를 인턴을 하면서 맡을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현장실습(Intern)'이 대학의 필수과목인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분기마다 3-6개월 단위의 인턴 자리가 아주 많다. 그리고 인턴은 회사에 있는 동안은 정확한 업무를 부여받아서 팀의 일원으로 일한다. 짧으면 3개월 단위로 인턴 하는 학생이 바뀌는데도 어떻게 회사가 잘 운영되는 것인지 신기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꼼꼼하게 인수인계하고 모든 업무가 담당자 없이도 가능하도록  문서화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말 좋은 업무방식이라고 생각해서, 한국에 와서 인턴을 했을 때도 내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서 독일 만큼은 아니지만 업무 매뉴얼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썼다. 그래도 모든 과정을 스샷으로 남겨놓기까지 하는 독일 방식에 비하면 소소했다. 독일인들의 이런 업무방식 덕분에 나는 독어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업무를 매뉴얼에 의지해서 헤쳐나갈 수 있었다. 반면, 이런 방식에 익숙한 덕분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멘붕(?) 상태가 되는 독일인 동료들의 모습도 많이 목격했다. 이 방식에도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혹시나 독일에서 일하고 싶은 분들은 독일의 이런 특징이 자신과 잘  맞는지 미리 생각해보신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무적인 일에는 반복적인 부분이 참 많은데, 독일에서 매뉴얼을 만들면서 그리고 언어도 모르는데 매뉴얼대로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 일은 나 아닌 누구라도(심지어 언어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진로를 고민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선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매뉴얼화하거나  문서화하려고 할 때,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인지 의심(?) 받기도 했고 중요도가 낮은 일이니 반드시 할 필요 없다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 한국 회사에서 인턴에게 제대로 된 업무 교육을 하는 경우도 드물면서, 인턴 업무를  매뉴얼화하는 것에도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느꼈다. 결국 그 시기가 문제일 뿐 나는 회사를 나가거나, 그 회사에서 직원이 되어 다른 일을 할 것이고 누군가가  이어받아하게 될 일인데 부정적인 반응이었던 이유를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혹시, 자신이 하는 일이 매뉴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그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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