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토지 강탈은 없었는가

by 레퍼런스

이번 챕터부터는 그들이 제시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를 뜯어볼 것이다. 그들은 사실과 통계를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통계와 수치만 맥락을 제거하고 활용하고 있으며, 수탈의 의미를 직접적 무력으로 빼앗아가는 강탈의 의미로만 협소하게 해석한다. 또한 수탈의 원천인 잉여가치 규모를 키우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성격을 희석시키고 있으며, 식민지 조선 내부에서 발생한 경제 수치 일부만 강조한다. 반면 그렇게 발생한 부가가치가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어디로 귀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가 과연 조선인들의 토지를 강탈하지 않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일제의 토지강탈은 없었다?

토지조사사업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이하 총독부)의 정책을 언급하는 첫번째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소 불분명했던 토지 소유 관계를 근대의 기준에 맞게 명확하게 정리하는 작업이기는 했지만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재정 마련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설명된다. 이 과정에서 소작농들이 보유한 실질적인 지분을 인정하지 않고 지주들의 이익만 지켜준 부분이 비판 대상이며, 신고주의 원칙으로 기한 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총독부가 토지를 빼앗아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신고주의 원칙을 활용한 토지 수탈은 일어나지 않았고 농민 사유지를 국유지로 강제 편입한 사실도 없으니 토지강탈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신고주의를 빙자하여 명확한 농민 사유지를 총독부가 빼앗은 사례는 찾기 어렵고,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수용된 부분이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는 않은데, 이는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설명할 수탈의 복합적 성격을 학생 수준에 맞게 담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강탈 사례가 없지도 않다. 사업 당시 삼척군 원덕면에서는 사유림을 국유지로 강제 편입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농민들이 격렬히 항의하자 헌병대가 출동해 발포하고 시위 주동자를 투옥시켜 고문한 사례가 존재한다. 그러한 경우가 더 있었을 것 깉지만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런 자료를 우리가 보라고 친절하게 남겨두지도 않았으니 더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이상 토지조사사업 자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별다른 논쟁거리가 아니고, 핵심은 다른 부분에 있지만 그들은 토지조사사업만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마치 토지 강탈 여부를 가리는 것의 전부인 것처럼 다룬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은 토지 강탈 시도 중 하나의 단면일 뿐이다. 일제의 토지 강탈이 이루어진 것은 명백하다.


우선, 국권 피탈 과정에서 대한제국 국유지가 자연스럽게 총독부 소유로 변경되었다. 국토의 30%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이 역시 국권 피탈에 따라 수반된 토지 강탈이다. 대한제국의 국유지에서 소작을 하던 한국인 농민의 생업은 상실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수단을 통해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농민이 이주하여 대신 소작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소득 창출 수단이 일본인의 그것으로 바뀐 것은 토지 수탈이다.


일본인 연구자인 도라우미 유타카의 조사 내용에도 주목해야 한다. 도라우미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을 인터뷰했는데, 그는 농사를 직접 짓는 일본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본인 가운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은 굳이 낙후 지역으로 인식되는 조선으로 이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조선으로 왔다는 것은 일본 본토에서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었다는 것인데, 별다른 기반 없이 이주해온 중하층민 출신이 일시에 농사를 짓지 않는 지주로 변신한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의 생업 기반 토지를 대규모로 이주 일본인들에게 넘겨주는 일련의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매매를 가장한 토지 약탈

무엇보다도, 일제의 토지 강탈은 공식적인 강제병합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자료를 읽어보자.


“한인들은 특히 부동산에서도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군사 활동에 필요한 모든 토지를 제공하겠다는 조선의 약속을 기회로 해 일본군은 대도시 주변의 값비싼 토지를 점유했다. 한인들이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면 일본인들은 조선 정부에 그 보상을 요구하라고 답변했다...일본군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서 "군사적 목적을 위해"라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들이 좋아하는 토지를 점유했다. 나(헐버트)는 그와 같은 협잡을 저지시켜 달라고 여러 번 부탁을 받은 일이 있다. 한인들은 그들의 농지를 외국인들에게 평당 몇 센트씩 받고 팔려고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서울로 올라온다. 그들은 농지 소유자의 명의를 외국인 앞으로 해 놓음으로써 어처구니없이 강탈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1905년 동안에는 국민을 일본인들이나 조선의 관리들로부터 보호해 줄 정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단순히 1만 2천 명의 병사와 연병장을 만들고자 서울 가까이에 있는 가장 값비싼 8제곱 마일의 토지를 차지했는데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그의 1/16만으로 충분했다고 한다. 이 토지를 공매에 붙인다면 600만 달러로도 살 수 없지만, 조선 정부로는 다만 그곳을 옮기는 데 필요한 비용마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오직 20만 달러를 지급했다.”


헐버트는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그분이 맞다. 밑줄 친 부분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말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각종 군사 요충지를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매입했다. 제시된 사례는 실제 토지가격보다 30분의 1의 가치로 사들인 것인데, 이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대한제국 정부가 30분의 29, 즉 96.7%의 지분을 강탈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끼리의 강탈이 이 사례만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증언을 보면 이를 빌미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인의 토지를 약탈한 과정을 알 수 있다. 군사적 목적을 빌미로 토지를 점유하기도 하고, 터무니 없는 헐값에 강제로 조선인의 토지를 사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땅 주인들이 손해를 보는 수준은 위의 사례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땅을 외국인 명의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헐버트가 보고 들은 것과 같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약탈적 거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부터 식민지배가 끝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무력으로 직접 빼앗은 것이 아니니 강탈이 아니라 정당한 거래라고 주장할 것이다. 일제에 의한 토지 강탈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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