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량 수탈은 없었는가

by 레퍼런스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은, 조선을 저렴한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되었고, 역시 한국인에 대한 토지 및 식량 수탈로 귀결된 사업이다. 그들은 이 설명에도 딴지를 건다. 그들은 식량과 토지 수탈은 없었으며, 쌀은 수탈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거래된 것으로, 오히려 쌀 수출 증가로 인해 한국인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는 산미증식계획이 어떻게 수탈로 이어졌는지 차근차근 설명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과연 더 먹고 살 만해졌는가

산미증식계획의 결과, 증산량보다 더 많은 쌀이 일본으로 향했으며, 한국인들의 쌀 섭취량은 크게 감소했다. 부족한 식량은 잡곡에 의존했지만 전반적인 칼로리 섭취 수준은 낮아졌다. 그들은 쌀 이외의 식량을 다양하게 소비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건강과 웰빙을 따지며 일부러 잡곡밥을 챙겨먹는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무조건 쌀밥을 먹었다. 쌀은 우등재이고 잡곡은 열등재였다. 소득이 늘었는데 우등재 소비를 줄이고 열등재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식량에 대한 소비를 줄인 것이 다른 분야의 소비로 이어졌다는 증거도 없다.


반면 한국인들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 중 일부만 살펴보자. 당시의 도별 양식 분포표를 보면, 전 인구의 29.31%가 육류, 계란, 생선을 모두 섭취하지 못하고 식물에만 의존했고, 31.29%는 1가지만 섭취할 수 있었다.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낀 소작농들이 일으킨 소작쟁의는 1920~1939년에 이르는 시기에 확인되는 것만 14만 969회에 달한다.


총독부 통계로만 잡아도 1925년 기준 유랑민의 숫자는 15만 5112명이었으며, 1930년 기준으로 전국에 5만 8204명의 거지가 있었다. 지주의 수탈에 버틸 수 없었던 다수의 소작농들이 간도, 연해주, 일본으로 이주하고 유랑민 혹은 화전민이 된 것은 익숙한 내용이다.


아이 유기, 자살, 변사 사례도 크게 늘었다. 통계로 잡힌 유기 사례는 1910년에는 5명이었지만 101명(1915), 378명(1932)으로 점점 증가하며 이후에도 200명 대를 기록했다. 자살 사례는 1910년 474명이었지만 1003명(1915), 2714명(1935)으로 크게 늘었고 이후 2000명대를 기록했다. 변사자도 크게 늘었다. 한국인 변사자는 1910년 1,760명이었지만 1935년 11469명에 달했다. 한국인들의 삶이 그들의 주장대로 더 나아졌다면 발생할 수 없는 수치이다.


소수 일본인 지주계급 위주로 이익을 차지한 산미증식계획

그들은 <동아일보>에서 조선 쌀의 일본 수출을 막지 말라는 보도가 나왔다면서, 당시 농민들도 쌀 수출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고 주장한다. 1931년에 실제로 그런 기사가 실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론사는 정파성이 있으며 모든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 이득을 보던 지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사의 존재가 조선인 소작농의 처지를 왜곡시킬 순 없다.


일본에 대한 쌀 수출을 지지한 것은 총독부와의 협력 하에 이익을 본 소수의 지주계급에 불과했다. 그들 중 한명인 이영훈 조차 당시 전체 농가 중에서 지주의 비중이 3.6%에 불과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3.6%의 지주 중에서도 일본인 지주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다.


1921~1936년의 지주 구성을 보면, 200정보(1정보는 3000평) 이상 보유한 대지주 일본인은 169~187명에 이른 반면 한국인은 45~66명에 그친다. 반면 5단보(1단보는 300평) 이하의 토지만 가진 빈농층 일본인은 19530~50155명에 그친 반면 한국인은 162만 1350명~200만 571명에 달한다. 결국 쌀 수출 이익은 소수의 지주계급,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일본인 지주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 소작농들은 무지막지한 소작료로 쌀을 일본인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있는데, 쌀이 시장에서 값을 치르고 정당하게 거래되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무늬만 거래일 뿐 쌀 수출은 한국인 농민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진행된 것이다.


일본인 지주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 원인, 수리조합

식민지 조선 인구의 절대 다수가 한국인이고 이주해온 일본인의 숫자는 극소수인 상황에서 위와 같은 지주 구성이 나타나는 것은, 앞의 글에서 언급한 토지 약탈과 더불어 수리조합 사업의 부조리한 운영 때문이었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어느 정도 언급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수리조합은 농사를 지을 때 활용되는 관개시설을 새로 조성하거나 수리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는 조합이다. 해당 사업으로 인한 수익 당사자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회비를 납부하고 그 결과물을 향유하는 개념이다. 문제는 이 수리조합의 구성 및 운영이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매우 부조리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인들은 강 주변의 저습지나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곳에 위치한 토지를 저렴하게 매입한다. 그러면 총독부 및 하부 관청에서 수리조합을 편성할 때, 그다지 개량이 필요 없는 토지를 소유한 한국인들을 강제로 같은 수리조합에 편입시켰다. 여기에 수리조합비 산정에서 수리사업의 수혜자가 될 일본인 지주들에게는 가벼운 부담을 지우고, 한국인 농민들에게는 높은 비중의 조합비를 부담시켰다. (제국주의 정부는 이런 식으로 겉으로는 합법적인 절차를 가장하면서 내부적으로 개입해 수탈을 행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복잡한 측면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시설 공사는 한두푼으로 되는 게 아니다. 수리시설 비용을 공평하게 책정해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텐데, 의도적인 민족 차별이 들어가면서 한국인 지주들은 조합비를 내면서 토지 소유권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일본인들이 이 땅들을 헐값에 매입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한국인 지주와 자영농들이 몰락하여 소작농이 되어버린 것이다. 1918년에는 한국 농민의 37.7퍼센트가 소작농이었지만, 1932년에는 그 비율이 53.8%로 올라갔다. 그나마 대지주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조합비조차 소작농에게 전가했으니 이것도 수탈이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쌀 수출은 한국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은 더하지 못했고, 지주와 소작농 간 양극화만 심화시켰으며, 이익은 대부분 일본인 지주들이 차지했다. 산미증식계획은 한국인들의 삶을 더욱 악화시킨 수탈이었다.


공출에 의한 수탈

일제는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각종 물자에 대한 공출제를 시행했다. 역시 공출의 핵심은 쌀을 비롯한 곡물이었다. 농민들은 그나마 들고 있던 쌀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었고 할당량은 강제로 총독부에 '판매'해야 했다. 공출 압박은 점점 거세져 1944년에는 전체 양곡 생산량의 60%가 공출되기에 이르렀다. 제대로 가격을 쳐주지도 않고 다른 곳에 팔 수도 없고,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는 쌀까지 내놓으라고 했다.


공출할 식량을 빼앗기 위해 죽창을 들고 각 집안을 수색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심지어 출처는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발간한 보고서이며, 제도 상으로는 개인 별 공출이 실시되지도 않았던 1941년의 상황이다. 각 지방 경찰이 민심 동향을 조사해 보고한 <경제치안일보철>(1942)에는 "아기 엄마는 '내일부터 이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하고 절규하게 만드는 가혹한 공출"을 하고 있고 농민들이 "어떻게 하면 양곡을 숨길까 부심하는 실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경찰의 시선으로도 강제적 공출로 인한 민심 동요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졌던 것이다.


영락없는 수탈이다. 쌀만 수탈한 것도 아니다. 강점기를 통틀어 일본으로 유출된 한우만 해도 150만 두 이상으로 추정되며, 아마 전쟁 전에는 합법을 가장한 강압적 헐값 매수, 개전 이후에는 공출과 비슷한 수단을 사용했을 것이다. 쌀과 소만 그랬을까. 하지만 그들은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자행된 이 쌀 수탈과 그에 따른 농가의 식량 사정 악화 모습에 대해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통계와 팩트가 있음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일제는 한국인에 대해 심각한 수준의 식량 수탈을 행한 것이 명백하며, 이는 한국인의 자본과 노동이 농업 이외의 분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근대화에 써야 할 에너지를 빼앗았다. 일제의 농업 정책은 약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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