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공업화는 한국인 자본의 성장을 이끌었는가

by 레퍼런스

그들이 역사부정을 학문으로 포장하면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긴 했어도, 일제강점기는 낙후된 농업사회였던 조선의 산업화를 이끌고 현대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팩트'와 '통계'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화가 진행되고 경제 발전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그러한 잉여가치가 결과적으로 어디로 흘러갔는지 따져봐야 한다. 이 글에서는 과연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조선인 자본의 성장으로 볼 수 있는지 따져볼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공업화 근거

식민지 조선(이하 조선)은 실제로 공업화가 진행되긴 했다. 1918~1940년 사이 광업은 21.1배, 공업은 8.4배 증가했으며 10%였던 광공업 비중은 36%까지 높아졌다. 1920년에 비해 1940년 회사의 납입 자본액이 10배 가까이 증가((1억 8,000만여 엔->16억여 엔)했으며, 회사 중 가장 비중이 큰 광공업 회사(전체의 80%)의 자본액도 급증했다. 1926년의 공업 생산액은 5억여 엔 수준이었지만 1939년에는 18억여 엔까지 올랐다. 1920년대부터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보다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의 숫자가 더 많아졌으며, 철도와 도로 등 인프라 시설이 건설되면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럼 이 수치들은 한국인에게 부여될 수 있는지 검토해보자.


식민지 공업화의 실체

조선에서 이루어진 공업화가 현대 한국경제의 기반이 되었다는 설명이 성립하려면, 강점 당시 형성된 공업 구조가 해방 이후에도 한국인 스스로 운영될 수 있는 완결성과 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원료를 자급할 수 있거나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공장과 기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지 따져보자.


조선 공업은, 일본에서 자본재(기계, 공장, 원료 등)를 가져오면 조선에서 원재료와 중간제품을 가공 혹은 생산하여 일본으로 다시 가져가는 구조였다. 1918년에 비해 1940년 일본으로 이출된 생산재는 100배 이상 폭증했다.(300만 엔 -> 3억 6000만 엔) 이는 전체 생산재의 62%에 달한다. 1940년대의 자본재 비율은 1940년대에도 4.2%에 불과했고, 1940년 기준 기계의 이입 의존도는 75%에 달했다. 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설비, 기계, 도구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뒷부분에서 다루겠지만 조선의 공업화가 대한민국의 공업화로 이어지지 못한 원인이다.


그들의 말대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나 공장이 일정 시점부터 일본인의 그것보다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실을 제대로 따져보아야 한다. 회사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납입 자본액을 보면, 조선 전체에서 한국인 자본의 비중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1941년에는 8.5%로 떨어졌고 해방 당시에는 7.4%까지 추락했다. 숫자만 많을 뿐 조선인 자본은 경제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누렸다고 볼 수 없다. 한국에 대기업은 수십개가 있고 중소기업은 수천, 수만 개가 존재하지만 한국 경제가 중소기업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조선인 자본의 규모가 영세한 것은, 사업 분야의 차이에 기인한다. 조선인의 진출 업종은 1939년 기준으로 정미업(41.8%)과 양조업(11.8%), 동물 유지 제조업(9.5%)으로, 조선인 회사 중 63.1%를 차지했다. 정미업과 양조업은 전통적 소비재 업종으로 일제의 정책에 의해 새롭게 발전한 분야가 아니며, 동물 유지 제조업은 유기 공업 원료의 하청만 담당하는 것으로 경제 발전의 핵심인 중화학 공업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미약했다. 부가가치가 높지 않으니 경제성장의 혜택은 제한적이며, 딱히 강점기의 경제 정책때문에 성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1920년대에 비해 1940년대에 식료품(38%->24%)과 생활재(50%->25%)의 공업 비중은 더 감소한 반면 거의 일본인 기업이 차지한 생산재 비중은 증가(9.5%->44%)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경제성장은 조선 내 일본인 자본의 성장에 불과했다.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과 김연수의 경성방직은 총독부에 대한 매국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극히 예외적인 성공 사례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들조차 “자본금 규모로 보면 일본인 회사가 압도적으로 컸으며, 대규모 자본이나 근대적 기술이 요구되는 산업에서는 일본인이 주도”(김낙년)했음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앞뒤가 안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특기인 통계자료의 선택적 활용을 여기서도 선보인다. 그들은 1939년까지의 일부 자료만 인용하고 그 이후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전시 경제체제의 붕괴로 인해 ‘내핍 경제’가 일상화된 1940~1945년의 통계는 그들의 주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941년 이후의 전시 체제기에는 생산성이 급격히 하락했다. 전년 대비 공장 생산성(평균 생산액 증가율)은 1941년 –31.3%, 1942년 –7.0%을 기록했으며 노동 생산성(노동자 평균 생산액 증가율)은 1942년 –1.4%로 반전되었다.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물자 수송이 차단된 1943년 이후에는 모든 부분의 생산액이 격감했다. 조선의 공업화가 건실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이런 몰락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인 자본의 성장을 막은 법적‧제도적‧경제적 차별

아래 내용을 읽어보자.


“1920년대에는 소수의 일본 기업이 한국 광산의 80%, 산업체의 91%를 소유했다...한국 수출품의 90%는 일본으로 향했다. 생산된 쌀의 절반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한국은 자국민을 먹이기 위해 값싼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모든 관청의 수용물품은 상점에서 공급하는데...국비의 대부분은 여기에 소비한다...다 일본상인이 독점하고 한국인에게는 허가하지 않는다...(경남 양산)군청 서무주임인 일본인 서기와 헌병분견소장 및 공립보통학교 교장 등이 그들의 부하를 단속하여 한국인 조합에서의 구입을 금지시켰다...(군대 주둔지 및 감옥)군량‧마초‧세탁 등 여러 가지 작업이 많았는데,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한국인에게는 참여를 불허하였다. 철도 연변의 여관과 승객의 식품은 일체 일본인이 영업하였으며, 차내의 사역과 관청의 문지기, 각 도회지의 우편배달부도 모두 일인이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우선 중화학 공업의 핵심인 광산과 주요 산업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업들은, 아마 한국인 노동자들을 저임금, 혹은 무임금으로 착취하면서 생산한 물건을 일본으로 "수출"했을 것이다. 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착취하고 일본으로 양곡을 "수출"한 것과 같은 매커니즘이다. (그들은 이를 약탈이 아니라 정당한 수출을 통해 이익을 본 과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익 규모가 크거나 쓸만한 정부 발주 사업은 일본인들에게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통계로는 잡을 수 없는 이런 증언은 무시할 것이다. 하지만 강점기 경제에서 한국인 자본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총독부는 갖은 민족적 차별을 때로는 교묘하게, 때로는 대놓고 행하며 한국인의 경제 성장을 막았다.


그나마 겨우 나름대로 기업을 키워놓은 한국인들의 노력도 일제는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대기업 중심으로 중소기업을 통합하는 기업정비령 시행 과정에서 대다수의 한국인 기업을 통폐합해버린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보상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현대를 일군 정주영도 피해자였다. 정주영은 자동차 정비공장 '아도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1943년 '일진공작소'라는 일본 기업에 합병당했다. 그는 "강제 합병된 회사에 아무 의욕도, 정열도 없어져 곧 손을 떼었다."라고 회고했다.


대한민국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은 식민지 공업화의 잔재

일제는 조선의 일부를 "공업화"시키기는 했으나 조선이 자생할 수 있는 산업 구조를 남겨놓지 않았다. 공업 생산은 증가해도 핵심 소재와 부품은 일본 의존도가 높았고, 일제의 패전으로 분업 관계가 끝나면서 조선의 공업은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1946년 광공업 공장의 조업률은 5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오래된 설비가 고장이 나 교체하려 해도 국내에서 부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38년까지 존속한 공장 비율은 22.8%에 불과했고, 1938년 존재한 공장 가운데 1949년까지 존속한 공장 비율은 6.8%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술 전수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고급 기술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인은 간신히 취업을 해도 단순 노무직 위주로 자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술 이전 효과는 미약했다.

철도 종사원의 경우 단순 실무 경험밖에 없어 그나마 남아 있는 철도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자본 관리를 위해 익혀야 하는 금융 실무도 한국인은 익힐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해방 전후(1944년 6월과 1946년 11월) 남한의 공장과 노동자 수를 비교하면 모두 격감(-40.9퍼센트, -52.4퍼센트)했다. 산업별 생산지수(1940년도=100)도 해방 직후인 1946년, 1947년, 1948년에 광업(11.4, 17.8, 25.6), 제조업(25.8, 28.4, 37.1), 전기업(25.7, 31.6, 55.9) 모두 큰 폭으로 감소했다. 농업 역시 1948년(86.1)까지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그들조차 1946년에 해방 전의 정점이었던 1941년의 43.5퍼센트로 생산이 축소된 데다가 한국전쟁으로 또 하락했고 ,1969년이 되어서야 1941년 수준을 회복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일본, 일본인에게 귀속된 경제성장의 이익

그들은 인프라 건설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토지와 자본 강탈, 노동력 강제 동원 등의 경제적 가치는 고려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일본인 어음 중개인에게 돈을 맡겼다가 떼이거나, 일본인에게 토지를 구입했으나 해당 토지의 일본인 소작인으로부터 땅을 인수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동력 강제 동원 사례하나를 살펴보자.


“철로를 부설하거나 수리하면서 한인들을 고용...고위층에서는 일을 배정할 때에 한인들에게도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들의 명령은 여기까지이다. 일본인 공사 감독은 여기저기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이나 칼로 위협해 수백 명의 한인을 끌고 와서 일을 시킨 다음 1/3에 해당하는 노임을 지급한다. 한인들은 공사 감독에게 돈을 주고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한인들은 하루에 받은 노임의 2배를 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한 마을이 착취당하는 금액은 2만 달러에 이르며 그나마도 현금이 없어서 빚을 얻을 경우에는 ”월 12%“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대한제국멸망사)


이 사례는 앞서 토지 강탈을 다룬 글에서 다룬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강제병합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그렇다면 아예 강점된 이후에는 노동력 착취가 어떻게 이루어졌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저임금 착취는 공사 현장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당시 같은 일을 해도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서로 다른 임금을 지급한 사례가 잘 나타나 있다.


일본 삿포로농림학교에 교사로 취직한 한국인은, 일본의 국적이라 속이고 130여 원의 월봉을 받다가 한국인임이 탄로난 이후 25원으로 감봉당했다. 한국인 관리의 봉급은 봉급 직급에 따라 9~13원(헌병 보조원‧순사보), 13~35원(판임관), 40~100원(주임관), 180원(칙임관) 수준이었다. 반면 일본인 의 경우 헌병 및 순사들은 최저 30원은 받았고, 최하급 판임관 도 50원을 받았다. 방직공업 종사자의 경우 일본인 남성 성년공은 1.35엔, 한국인 남성 성년공은 0.60엔, 한국인 여성 성년공은 0.41엔을 받았다.


제반 산업에서 일본인 남성 성년공은 1.87엔, 한국인 남성 성년공은 0.86엔, 한국인 여성 성년공은 0.46엔을 받았다. 민족 차별에 따라 지급하지 않은 임금 차액은 모두 한국인을 수탈한 것이며, 한국인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는 모두 일본인에게 귀속되었다.


한편 일본 내무성 경보국이 만든 <특고월보>와 <사회운동상황>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일제에 강제 동원된 한국인 중 현장에서 탈출을 시도한 사람은 257,907명에 달한다. 피해자들은 각종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렸으며, 명목상의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그 와중에 금액 일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공제당했다. 그나마 받은 임금은 강제로 저축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지급되지 않았다. 극소수의 일본 기업(18개)이 미 군정의 명령으로 체불임금을 공탁하긴 했지만 일본 정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앙구스 메디슨의 역사적 통계에 따른 조선의 1인당 국내 총생산량을 살펴보면, 1911년 777달러였다가 1937년 1,482달러로 약간 오르긴 하지만, 결국 1945년이 되면 616달러로 강점당하기 이전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공업화 기반이 소멸되었기 때문이고,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조선의 공업화는 각종 자원을 총체적으로 고갈시키며 해방 후 평화산업 전환 및 경제 재건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조선의 경제 성장은 '한국인의 경제 성장'이 아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 전체 재산의 85%가 일본인 소유"(주익종)였다고 한다. 자기들도 모르게 일제가 조선을 수탈했음을 인정하는 언급인데, 이는 다음 챕터에서 다룰 청구권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가볍게 해주려는 꼼수를 부리다 발생한 자가당착이다.


주익종에 따르면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움켜쥐고 있던 재산은 52억 달러로 추산된다. 부유하고 권력과 연줄도 있는 일본인들은 패망이 가까워오면서 이미 조선 내 재산을 일본 본토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금액이 남았는데, 그렇다면 강점 기간동안 일본 본토로 빠져나간 재산의 가치는 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식민지 공업화는 한국인의 자본 성장과 한국경제의 주춧돌이 되지 않았다. 식민지 공업화는 한국경제를 일본 경제의 소모품으로 갈아넣은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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