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식민지 교육 역시 한국인들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총독부가 한국인들의 교육열에 응답하여 적극적으로 교육정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총독부는 3면 1교제, 1면 1교제 등으로 한국인의 교육열에 호응했으며, 고등교육 기관의 수는 부족했으나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는 노력을 했다. 해외유학생들이 귀국 후 종교계‧교육계에서 활약했고 해방 후에는 정계‧관계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식민지 교육 투자의 실상
한국인에 대한 학제 차별은, 표면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제도 상 허용이 되어 있다고 해서 한국인이 재조선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일제는 여러 수단을 통해 한국인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을 방해했다. 학교 설립 시도를 차단하고, 고등교육 기관 입학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에게는 기회 수준이 달랐다. 한국인과 일본인에게 부여된 기회의 차이는 아래의 수치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 1931년 기준 보통학교 수 : 조선인 11,952명당 1개교 / 일본인 1,137명당 1개교
- 1931년 기준 보통학교 학생 수 : 조선인 42명당 1명 / 일본인 7.8명당 1명
- 학령 아동 취학률 : 조선인 아동 19.9% / 일본인 아동 99%
- 고등교육 기관 : 중등교육 차별 더욱 심각 / 경성제대 학생 수 조선인 342명, 일본인 756명
- 전문학교 및 대학의 학생 수 : 조선인 13,322명 당 1명 / 일본인 275명당 1명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일제는 한국인들을 착취하면서 확보한 재정을 재조선 일본인 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한국인들에게는 보여주기 수준의 바늘구멍만 허용하였다. 초등학교 수준인 공립보통학교 취학률은 중일전쟁 이전까지 40% 이하였다. 전쟁 이후 60%를 넘긴 했으나 이는 한국인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전쟁에 더 쉽게 동원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나마 1945년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갔을 때 한국 아동의 중등학교 진학률은 겨우 5%였고, 대학 학위를 받은 한국인의 60%는 일본에서 공부했다. 일본유학생의 존재가 한국인들에 대한 기회가 충분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통계를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통계는 피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아주 작은 파편을 과대포장한다.
특히 대학 학위 취득자의 경우, 모국 취득에 비해 유학생 비중이 절반이 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이는 모국에서 제대로 된 대학교육 시스템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조선 내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읜 학부는 단 3곳에 불과했고 그나마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생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설립 직후 식민 지배가 끝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대학교육 확대를 요구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조선비행기공업과 경성방직이라는 극소수 사례가 한국인 자본 성장의 증거가 될 수 없듯이, 한국인 극소수가 갖은 차별을 뚫고 간신히 좀 더 교육을 받고, 그 중 일부가 해방 이후 존재감을 발휘했다고 해서 식민지 교육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제대로 된 교육 기회가 주어졌다면 한국인의 활약 시기는 더 빨라졌을 것이고 그 분야는 다양했을 것이다. 유학생들이 귀국 후 종교계와 교육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럴 수 있는 분야가 종교와 교육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애초에 독립운동만 하지 않는다면 총독부에서도 굳이 건드리지 않는 영역이고 식민지 조선을 좌우할 수 있는 큰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교육 역시 총독부체제의 핵심에는 진입할 수 없었으며 학교 설립부터 수업까지 갖은 통제만 가득했다. 정치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유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가 주어졌다면 해방 후가 아니라 그 전부터 활동할 무대가 주어졌을 것이며, 그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해당 유학생들은 일제의 지원 덕분에 활약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통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낸 것이다.
교육과정에서의 한국인 차별
겉으로는 대등한 학제 속에서, 한국인은 수업의 형식과 내용에서 지속적으로 차별을 당했다. 강점 말기로 갈수록 한국어가 통제되고 사용이 금지된 내용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미 강점 기간 내내 일본어 수업만 높은 비중으로 이루어졌으며 사회의 변화를 알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학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여러 과목에서 황민화 교육은 이미 진행되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된 차별교육 양상은 다양하다. 식민지 교육의 핵심은 일단 동화교육이다.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으며, 일반 교과도 일본어로 가르쳤다. 한국인 교원이 한국말로 통역해주는 것도 금지했고, 학교 안 가구와 화초, 수목도 일본어로 적었다.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강요당하는 것은 해당 학생들의 학습 효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인 학생들은 편안하게 교과 내용에 집중할 때 한국인 학생들은 글자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수업 내용을 따라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인 교사들이 이를 배려해서 수업 속도를 늦추거나 보충수업을 해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해당 교과의 주요 내용을 제대로 교육하지도 않았다. 수학에서는 “대수학의 인수분해 이상과 입체기하학, 삼각법은 모두 한국인에게는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역사와 지리는 실질적으로 일본에 관한 것만 배울 수 있었다. 일본인 학교는 중학교 과정에서 일찌감치 실탄 사격을 할 정도로 체육을 살뜰히 챙겼지만, 한국인 학교에서는 교련과 야구, 축구 등의 운동조차 금지되었다. 철도, 우편, 전신 등 근대 문물 발전의 핵심 인프라에 대한 교육과정은 대한제국 시기에 있던 것도 폐지했다. 구미 지역으로의 유학은 아예 금지되었고 일본 유학조차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한국인이 고등지식을 익혀 '한국인'으로서 돋보이려 하거나 단합심과 군사 기술을 익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던지 학생들의 문학회를 감시하고 연설을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트집을 잡아 경찰서에 잡아 고문하고, 다시는 연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는 지경이었다.
박열이 격었던 우민화교육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박열은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이 학교의 교육 수준은 일본인 중학교보다 훨씬 낮았다. 영어수업은 금지되었으며 학생이 영어강의록을 읽는 것마저 금했다. 세상에 대한 한국인의 시야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주요 교과목은 일본어였으며 모든 학과는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한 내용으로만 수업이 이루어졌다. 박물교사와 역사교사 지망생에게는 일본과 조선은 같은 나라이며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인종이라는 것을 고취하면서 천황의 은혜를 설명했다. 사립학교에는 조선인 교사가 많다는 이유로 박열 등이 사립학교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강점기 말기도 아니고 1910년대 상황의 단면이다. 그나마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교육 기회를 제공받은 한국인이 처한 상황이 이 정도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학교를 졸업한 후 갖추게 되는 능력은 차이가 발생했을텐데, 그들은 이를 능력에 따라 정당한 대우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 교육은 통계로 보는 전반적 교육기회부터 교육과정의 실제 적용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한국인을 차별하고 발전 가능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유괴범이 아이를 굶기고 학대했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의젓하게 자라났다고 해서 유괴범이 아이를 잘 키운 것은 아니다. 식민지 교육은 한국인의 재산과 가능성을 일제를 위해 소모시키는 수탈의 한 과정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