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들을 통해, 그들이 피해자들을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자료들(문옥주의 증언, 박치근의 일기, 미 전시정보국 49번 보고서)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그들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
그들은 취업사기 및 강제동원 정황이 확실한 사례에 대해 실증적 반박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예외적 사례와 증언만 발췌하여 조작했다. 문옥주의 증언 중에서도 일부만 잘라 언급했으며,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부분 등은 믿지 않았다. 실제로 강제연행을 담당했던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글의 마지막 별첨 참조)에 대해서는 아무 근거도 없이 거짓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전시경제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논의를 전개했다. 피해자들이 서류상으로는 자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임금을 지급했으니 정당한 노동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당사자들의 실제 처지에 대한 실증을 회피하였다. 강제징용 문제와 유사한 맥락이다. 고대 노예제 하 노예의 처지와 비교하며, 외출이 가능했고 약간의 휴식 시간이 제공되었다는 이유로 노예의 처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신분 별로 귀천이 나뉘고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던 전근대와, 비록 실질적으로 전쟁과 인권 유린이 여전히 벌어지더라도 신분제가 폐지되고 인권 개념이 강조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사회는 평가 기준이 다르다. 쇠사슬에 묶여 채찍질을 당해야만 노예인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매춘부가 아니었고, 식민 지배 권력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강간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으며 노예적 생활을 했던 국가적 범죄의 피해자이다.
남은 이야기 : 성폭력 피해자를 숨게 만드는 사회
이영훈은 "그렇게 많은 여인이, 당시까지 생존한 수천 명의 여인이, 숨을 죽이며, 그들의 과거를 숨겼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 손자, 친구를 잃을 두려움에서였습니다. 저는 그 편이 더 진솔한 보통 사람들의 정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신고를 꺼리게 만들고 평생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며 살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성폭력 카르텔이 가지고 있는 인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언급이다. 그들에게 성범죄는, 피해자가 숨어 살며 곪아가는 상처를 애써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피해 사실을 밝히고 가해자들을 응징하며,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누리는 모습은 그들의 머릿 속에 없다.
다만, 이영훈이 가지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 수준이 과연 한국사회 대중의 평균적 수준과 크게 다른가 하는 찜찜함은 남는다. '위안부'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성범죄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게 만들고 가해자의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되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이영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밝혀도 삶에 지장을 받지 않고,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지켜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위안부' 피해자들은 좀더 일찍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 다움'을 강조하는 사회는 피해자 자신이 더러워졌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피해자들은 과거를 숨기고 숨어 살아야 했고 인생의 남은 시간을 제대로 자신을 위해 활용할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미 피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 제대로 된 혼처는 구할 수 없었고, 먹고 살 길도 없으니 첩살이를 했다. 과거를 숨기고 결혼했다가 남편에게 발각되면 학대에 시달리거나 이혼당했다. 가족들조차 피해자들을 멀리했다. 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여성들을 배척했던 그 모습에서 단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부정 극복은, 그들을 극복하는 데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시선과 사고방식 자체를 뜯어고쳐 나가야 한다. 그건 우리 모두의 과업이다.
*실제로 강제연행을 담당했던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한국일보, 1992.1.17.)
분명히 해둘 것은 첫째, 위안부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노예사냥처럼 강제로 체포한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위안부' 모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경찰 군병력의 지원을 받아 골라서 체포해간 것이니 모집이라는 말은 부당하다. 둘째는 '위안소'를 일본 정부가 관리했다는 말이다.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마굿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사람이 살지 못할 곳에 가두고 하루 몇 십명씩의 병사를 상대하게 한 것이 집단강간이지 관리란 말인가. 현지부대 군의관이 '위안소'를 공동변소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여기 있다.(군의관의 전장보고 의견집이라는 자료집을 제시함)
출발에 앞서 목표 인원을 현지 경찰에 통보하면 어느 마을에 부녀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를 조사한 자료와 지도를 제공해 준다. 20~50명의 경찰 또는 군병 지원을 받아 트럭을 몇 대씩 몰고 마을에 간다. 경비 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끌어 모으고 젊은 여자만 골라서 트럭에 실었다...(마을 사람들의)저항이 대단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차고 경비병들이 총검으로 위협해 진압했다.
1938년께 중국 남경과 한구에서 장교 대우로 일해서 잘 안다. 그것은 매춘이 아니라 집단 강간이었다...강제연행한 곳은 한국 뿐이었다. 일본 여성을 공급하면 병사들이 죄의식 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것을 고려해 일본여자는 보내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는)20만 명이다. 당시 우린느 조선인 남자징용자 2백만 명, 종군위안부 20만 명이라고들 떠들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강제연행이) 그때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장에 나간 군인들을 위안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고 국가가 명령한 것이니까 열심히 했다. (관련서류 소각지시을 받은 경험에 대해)'위안부'는 처음부터 극비사항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서는 없었다고 본다. 최근에 발견된 문서는 예외적으로 다른 문서에 부속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