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새해 - 말랑한 가래떡

by 이상하고아름다운

"어머, 여기에 방앗간이 있네."


연휴에 떠난 가족여행이었다. 기차역 근처 식당에서 배를 두드리고 나와 소화도 시킬 겸 시내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촌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식당과 카페가 늘어선 1층짜리 건물들 뒤에 시간 여행을 하듯 오래된 거리가 숨겨져 있었다. 낡은 초록색 나무 문틀에 끼워진 격자 유리엔 빨간 페인트로 방-앗-간이라고 적혀있었다.


"방앗간이라고?"


딸아이가 신기한듯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방앗간이라는게 아직도 존재하는 거야?"


나도 함께 흐린 유리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어둑한 가게 안에는 전기방아가 두 대. 빨간 다라이와 파란 소쿠리들, 소줏병들, 그리고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포대자루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방앗간에서 뭘하는데?"


딸아이는 멸종된 공룡이라도 발견한듯 신기해한다.


"방앗간에서 뭘하냐구?"


그 순간 방앗간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던 옛기억이 흑백영화처럼 드르르르 눈앞에 펼쳐졌다. .




명절 전날이면 불린 쌀 한 말을 다라이에 담아 방앗간에 갔다.

사람은 없는데 빨간 다라이들만 쭈욱 줄을 서 있다. 내가 다라이를 내려 놓은 후에도 계속 다라이를 이 줄을선다.

방앗간 안에서는 덜컹덜컹 기계 돌아가는 소리, 다라이가 내던져지는 소리, 아주머니들 수다소리, 아저씨의 영차하는 소리, 그리고 뽀얀 가루가 꽉 찼다.

한 사람의 다리이에 든 쌀들이 기계에 부어지면 다라이들을 한걸음씩 앞으로 옮겨간다. 명절이면 방앗간에서 쌀을 빻던 시절에는 방앗간 앞에서 줄이 무척 길었다.

다라이만 줄세워 놓고 집에 갔다가 올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쌀이 떡이 되는걸 구경하느라 몇 시간씩 방앗간 앞에 서 있기도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방앗간 아저씨가 쌀을 덮어둔 면보를 걷어내고 다라이를 기계 위에 뒤집는다.

뽀얗게 불은 쌀이 부어지면 벨트가 무서운 속도로 윙윙 돌고, 기계는 앞뒤로 덜컹덜컹하고, 아저씨는 재빨리 다라이를 밑에 가져다 놓는다.

기계아래 미끄럼틀 같이 생긴 곳으로 곱게 갈린 쌀가루들이 떨어져 나온다.

한 번 갈린 쌀은 아직도 거칠어서 아저씨는 내 다라이를 한번더 입구에 부어서 곱게 갈아준다.

추석 때 같으면 이걸 들고 집에 가겠지만 설에는 그러지 않는다.


곱게 갈린 쌀을 옆에 있는 기계에 붓고 기다리면, 아래에 있는 두개의 구멍에서 가래떡이 쭈욱 밀려 나온다. 매끈하고 말랑하고 뜨끈한 가래떡은 찬물을 받아논 대야로 떨어진다. 떡들이 붙지 말라고 물에 담그는 것이다.

떡이 길어지면 아저씨가 가위로 싹둑 자른다. 대야에는 말랑하고 쫀득한 떡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물에서는 김이 설설 올라오고, 갓 나온 떡들은 얼마나 반짝반짝하던지.

더이상 파이프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떡을 건져서 기름을 살짝 발라준다.


나는 말랑한 떡을 한 줄 집어 먹으며 떡이 쌓인 다라이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 차례상에 올라갈 떡국을 끓이기 위해 동그랗게 잘라야하지만 일단 너도나도 한 줄씩 잘라서 꿀이나 간장을 찍어 한볼테기씩 밀어넣는다.


명절음식을 하느라 지친 여자들도, 못나게 사는 모습을 감추느라 허세를 부리던 남자들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볼이 빨개지도록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따끈한 가래떡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느라 다들 말이 없다.


그 쫄깃하고 말랑하고 따스한 맛은 설에만 맛볼 수 있는 따스함이었다. 못나고 지치고 허름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얀 떡으로 깨끗한 새해를 맞는다.

몇시간만 지나도 꾸덕꾸덕 말라가는 떡처럼 딱딱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질걸 알지만, 하얀 떡국 한그릇을 앞에 두고 있으면 어쩐지 올 한해는 포드랍고 고소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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