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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Aug 23. 2021

리듬 속에서 키보드를

아홉 번째 세계


최근에 재미있는 책 하나를 발견했어. 이야기 자체보다 형식이 매우 독특했거든. 어떤 한 남자에게 일어난 반나절 동안의 짧은 해프닝을 다룬 책이야. 지극히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를 아흔아홉 개의 글로 표현하고 있었어. 어쩜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할 수 있을까 감탄을 했지. 작가는 바흐의 변주곡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니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이 얼마나 가능성이 큰 영역인가 깨닫게 되더라.

나도 늘 그런 생각을 하거든. 가끔은 논리적으로, 가끔은 감각적으로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우연히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나 이미지도 결국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일 테니 이런 노력은 하면 할수록 작업을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아. 늘 많은 걸 깨달은 것 같아도 새로움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어디선가 나타나 고요한 일상을 깨우며 우리를 뒤흔들곤 하지.




“일단 리듬을 바꿔보는 거야.” _ BGM # Intertwined | Avishai Cohen Trio


2021년 8월

아비샤이 코헨 트리오(Avishai Cohen Trio)의 연주를 들으며 키보드 위를 재즈스럽게 무작위적으로 타이핑했다.

쓰인 글은 매우 의외의 구석을 담고 있었고, 달리 보면 생뚱맞고 엉뚱함이 가득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끄적거렸던 글을 다시 보니 정확히 어떤 느낌으로 쓴 글인지는 생각이 나지는 않았지만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그곳에 가득 담겨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지는 글이랄까.

기쁨의 세리머니를 키보드를 타이핑하는 것으로 대신해 볼까?

다. 다.. 다. 다.. 다.

다시 아비샤이 코헨의 음악을 들으며 아무 단어나 손으로 지껄이다 보니 ‘리듬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할 때 산책을 하며 걷다 보면 문득 생각이 정리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하는데 딱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

언젠가 테니스 만화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독특한 리듬의 라틴음악을 듣고 곧바로 이어진 테니스 경기에서 자신의 원래 리듬에서 벗어나 상대의 리듬을 빼앗아 세트를 이겼던 장면이다. 서로 주고받는 테니스 경기도 결국은 서로의 리듬에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을 깨뜨리고 누가 먼저 한 방을 날리는가 가 중요할 테니까. 그러고 보면 스포츠도 참 크리에이티브한 영역이구나 싶다.

그렇네. 생각해 보면 리듬이란 자신의 루틴을 지키는 것과 벗어나는 것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창조적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재즈를 들으며 드로잉 하는 것과 쇼팽을 들으며 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글도 마찬가지였고, 산책도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리듬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세상의 모든 풍경과 사물과 사람들의 행위 하나하나에 모두 리듬이 얹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일상과 예술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때론 죽어라 책상에 붙박이로 붙어 글을 쓰려고 해도 제대로 된 글이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는 반면 이렇게 즉흥적인 방식으로 글을 건져낼 수 있다면 그건 나름대로 공평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것도 아무 때나 그분이 오시는 것은 아닐 테니. 그러니 정공법이든 아니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잘 되는 것에 감사하면서 살기로 하는 게 현명하다.


자, 다시 이어폰을 끼고 새로운 리듬의 음악으로 장착하고 타이핑을 해볼까? 뭐가 좋을까. 아까보단 좀 더 섬세함이 필요할 것 같고 절제된 느낌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에릭 사티(Erik Satie).



P.S.

가끔 다른 사람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들어보는 것도 신선한 자극이 되곤 하잖아. 비슷한 옷을 고르는 습관을 깨 보려는 시도에 비해서 음악에 대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좀 더 쉬운 일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네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해지더라. 우리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해 보는 건 어떨까? 어떤 때는 대화보다도 취향으로 서로를 알아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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