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세계
기억해. 어린 시절의 놀이 같은 일상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금 이곳에 없는 걸 보니 어딘가에 남겨둔 채 지나쳐왔나 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건조한 일상으로 점프해 재미없는 어른의 세계로 와버린 거겠지. 참 아쉬워. 찾으려 하지조차 않았어. 중요한 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잃어버렸던 순간들을 되찾고 싶었어. [패터슨]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생각들이 점점 강해졌지. 주인공은 일상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와 문장으로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야. 어제 쓰던 시에 오늘의 시를 얹어 끝이 나지 않는 일상의 예술을 하고 있었지. 무엇이 되고자 쓰는 시가 아니었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들어낸 그 시들은 무엇보다 특별했어. 행복해 보였지. 매일 똑같은 루틴대로 흘러가는 일상 같았지만 ‘시’라는 예술이 그의 매일을 다르게 만들었거든. 그 사실이 감동적이었어.
그리고 나에게 질문했지. 나는 건축가로서 예술과 기술, 인문 사이 어딘가에서 그 사람만큼 행복한가? 대답은 No! 아니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일상의 예술과 일로서의 예술은 다르다는 것을. 그렇다면 일과 일상 그 사이 어딘가에서 대안을 찾고 싶다고. 나는 일상의 예술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강한 욕구에 빠져들었지.
그래, 내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 것도 이 영화를 보던 그즈음이 아닌가 싶어. 일도 일상도 무엇보다 즐겁게 하고 싶었거든. 아마도 나는 소모적이고 부조리한 방식의 일에 지쳐있었을 테지. 일상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일이 최근 몇 년 동안 내게 가장 큰 이슈가 되었어.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예술을 만들어가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일기를 써 내려갔어. 그리고는 글이 나를 이끌어갔지.
2022년 7월
뒷걸음질
천천히 느린 스텝으로 나는 뒷걸음질한다.
앞으로 향하던 걸음을 뒤로 돌린다.
그럼으로써 나는 지금 이 자리를 얻는다.
빨리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내가 유학생으로 파리에서 공부하던 때 가장 많이 한 행동은 발걸음을 되돌리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생각해 행동하지 않고 마음과 생각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한국에 돌아와 현상설계를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빠른 템포가 몸에 배어 일상에서조차 조급하고 빨라졌다. 좀 더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으로. 어쩌면 ‘빨리빨리’의 한국인의 습성은 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속도를 부추기는 환경 속에 있기 때문 아닐까?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또 속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을 깨닫고 허탈했다. 일상이 피폐해져 갔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해 낸다. 뒷걸음질을 하던 그 순간들을.
길을 걷다가 어느 골동품 가게 앞에서, 하천을 산책하다가 다리 밑에서, 타워 크레인이 돌아가는 순간에, 햇빛에 반사된 웅덩이의 물을 지나다가, 북한산의 색이 오늘따라 조금 달리 보여서, 익숙한 냄새가 나서, 처음 듣는 새소리가 들려서……
나는 다시 뒷걸음질을 시작한다.
뒷걸음질은 잃어버린 기회를,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 시절의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 풍요로워졌음을, 그로 인해 일상이 예술로 가득했음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
드로잉의 틀을 깨다
문득 드로잉을 하다가 뜻밖의 문장이 떠올랐다.
‘몸에 그리는 그림, 타투.’
오호, 옷소매를 걷고 팔뚝에 그림을 그려볼까? 생각과 동시에 타투 이미지를 찾아 피부 결을 따라 펜으로 타투를 새긴다. 종이 위에 그리는 그림과는 손 끝에 전해져 오는 촉감이 다르다. 오, 멋진데! 타투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었는데, 이렇게 쉬운 거였다. 게다가 금세 지워져 매일 하나씩 그려볼 수도 있겠다. 이런 만족감이라니.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힘줄을 따라 그림을 그려볼까 궁리를 한다. 뭘 그리면 좋을까? 되고 싶었던 것, 다음 생에 되고 싶은 것? 아니면 나비나 꽃, 나무를 그려 넣어 숲이 되어도 좋겠다. 그도 아니면 글씨를 새겨볼까? 유머러스한 그림도 좋겠어. 만화 캐릭터를 그려볼까? 무엇이든 좋겠지. 몸에 새긴 그림이 사라질 즈음 다른 그림을 그리면 될 테니까.
손등에 새 몇 마리와 꽃, 달을 그려 넣고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주름과 모공, 힘줄의 도드라진 굴곡을 따라 본래의 형태는 일그러지고 변신해 나갔다. 새가 살아 움직이고, 꽃이 길게 늘어나고, 초승달이 활짝 웃는 입처럼 보이는 듯하다. 그림이 살갗 위로 살아 움직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변하는 그림이라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아주 작은 행위 예술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며칠 전 진관사에 갔다가 돌멩이 몇 개를 주워왔다. 깨끗이 물로 닦아내고 말려 책상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오며 가며 돌멩이에 그리고 싶은 것들을 상상해 나갔다.
기와 파편처럼 보이는 돌을 꺼내 검은색 펜으로 색을 칠했다. 기와에 새겨져 있던 희미한 요철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리고 검게 변한 기와에 금색 펜으로 달과 별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기와 조각에 밤의 세계가 찾아왔다.
또 하나의 커다란 로망이 있다. 조용한 새벽에 눈에 띄지 않는 벽 하나를 골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언젠가, 언젠가, 인적 없는 골목에서 그 장소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볼 것이다.
그라피티, 벽화는 도시의 여백에 그리는 그림이다.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 그에 맞는 위트 있는 그림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몰래 하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잘 알아채기 어려운 곳에 그려놓고 그걸 누군가가 발견하고는 미소 짓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몇 배는 더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모두 잠든 밤 그라피티를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즐거움을 조금 알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안의 목소리가 수다스러워진다. 즐거운가 보다 생각만으로. 어릴 땐 바닥이든 벽이든 누군가의 소유든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뭔가를 끄적이곤 했다. 그것도 연필이나 펜 대신 나뭇가지나 흙, 돌을 이용해 그림의 영역과 도구의 한계 없이 자유로웠다.
그걸 되돌리기 위한 일상의 예술로
한 걸음 다가선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카테고리 안에 분류되어 있는 물건이 아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들에 관심이 많다.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만들어 내면 세상에 존재하게 될 물건들.
언젠가 아빠의 오래된 공구 박스 하나를 발견했는데 모두 합치면 못 만들 것이 없을 것처럼 공구의 종류가 다양했다. 작은 손 망치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잡이를 나무로 직접 다듬어 빨간 페인트로 마감한 것이다. 기억 속에 아빠는 늘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제품화된 물건보다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 쓰곤 했다. 그래서 물건에 깃든 역사가 다르다.
요즘 늘 궁리를 하곤 한다.
무엇을 만들어볼까?
쓸모없는 걸 만들어서
쓸모 있게 써 보는 것도 좋겠다.
평범한 순간에서 특별함을
빗방울이 점점이 안경 위에 내려앉아 거리의 풍경이 딱 그만큼씩 흐릿해졌다. 안경을 닦을 욕구를 찾지 못한 채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속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스프링클러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운 물 입자들처럼 하늘 속 어딘가에서부터 땅을 향해 아래로 비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문득 안경 위의 세계를 보며 점묘화가 떠올랐다. 이런 순간이었을까? 점묘화가 태어나기 이전 최초의 시작, 작은 불씨 같은 순간이란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시작을 상상해 보자.
사물의 표면에 묻어있던 액체가 어딘가에 찍혀있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는데 그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다.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니 심지어 여러 번 찍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다. 판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런 수많은 각성을 거쳐 도착한 예술 인지도 모른다. 회화 사조나 방식은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이루어낸 것이다. 단순한 발견이 단초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디어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뭔가를 경험하며 얻게 될 때가 많다. 세상이 돌아가는 작동 원리라는 것은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건축구조를 떠올릴 수도 있고, 바람에 움직이는 천 조각을 보며 설치작품을 떠올리거나 텐트를 디자인할 수도 있다.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다가 사람들의 발에 포커스를 맞추며 좀 더 편한 신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건설 현장의 크레인이 움직이는 것을 내다보며 작업의 각도를 바꿔보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포착하며 일상의 예술, 일상의 과학, 일상의 철학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런 각성의 과정을 거쳐 지금 이곳에 있을 것이다.
평범한 순간이 특별한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그 과정에 집중하며.
일상의 감각을 확장하다
건축 답사를 다니며 늘 고민했던 것이 있다. 장소나 건축, 풍경 앞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마치 정답이라도 있어 그것을 맞춰야 할 것처럼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고민하곤 했다. 그것이 객관적인 시각과 관점인 것처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풍경에 대한 감상문은 각자의 몫이다. 내가 감지하고 느끼는 세계와 실제 세계 그리고 다른 사람이 느끼는 세계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예술의 여지가 시작되는 것 같다.
# 시간 감각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노곤해진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다. 책상 앞에서 뭔가를 끄적이다 보니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처럼 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 흐물흐물하게 지나가 버리고 있다. 시계는 벌써 두 시에서 세 칸이나 더 전진해 있다. 이런… 세 시간이 대체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시간은 우리의 관념에서 벗어나곤 하니까. 시간은 단순한 숫자 그 너머에 있다. 그 신비로움은 일상의 예술을 하고 있을 때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훌쩍 지난 시곗바늘 뒤로 일상의 예술이 머물다간 흔적이 보이는 듯도 하다.
# 소리 감각
잠결에 새벽의 소란스러운 기척들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눈을 뜨지 않았다. 소리의 감각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감각이 돌아오는 데 한참을 기다렸다. 눈을 꼭 감은 채로, 온전한 소리의 세계에 집중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낮잠을 자다가 어렴풋이 들려오던 소리들이. 온돌 바닥에 누워 있으니 눈을 뜨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일상의 소리가 섞여 들어 느긋함에 빠져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저녁 짓는 소리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는 엄마의 목소리가 따뜻함을 더했다. 온기에 세상이 좀 더 둥근 모서리로 둘러싸인 듯했다.
소리는 원래부터 보이는 감각이 아닌 들리는 감각이니 소리의 주체를 눈으로 찾기 전에 소리에 집중해 보려는 것이다. 오직 소리에만 집중하기란 일상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눈을 감고 소리에만 집중해 걸어본다거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는 경험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시각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시각에 의해 다른 감각들이 축소되곤 한다.
오늘 밤은 헤드폰으로 드뷔시의 ‘달빛’을 들어볼까?
온전히 소리에 집중한 채.
# 계절에 대한 감각
모든 건물에 에어컨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여름이 되면 마치 거대한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공기를 가두어 차갑게 만들고 습기를 빨아들여 균질한 공기를 만든다. 마치 냉장고 안에 나란히 진열된 채소와 과일처럼 최적화된 환경에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간다.
거주하는 공간의 쾌적함을 위해 밖으로 밀어낸 그 모든 불쾌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모두 화살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런 이미지를 그려보다 보면 뭔가 디스토피아적인 SF영화를 보는 듯하다. 또는 한 편의 우화 같기도 하다.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싶을 뿐이다. 되돌릴 수 없는 문명을.
최적화된 환경을 위한 장치로 인해 여름의 창은 창으로서의 역할이 점점 줄어만 간다. 집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지 밀폐용기는 아닐 것이다. 공기가 들어가고 나옴이 적으니 자연히 바람이 잘 통하지 않고 고이게 된다. 사계절 내내 냉방과 난방,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일상. 온갖 기계음들이 배경음으로 깔리고 감각이 비활성화되는 회색지대가 된다. 창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고 꽃 향기가 들어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평범한 경험이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지하철과 같은 장소에 있다 보면 내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일시적인 방향 감각의 실종이다. 우린 다양한 종류의 감각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외면하고 싶을 만큼 쾌적함을 주는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의 유혹을 나는 최대한 멀리하는 중이다. 적어도 우리 집은 냉장고가 아니다.
집이 숨 쉬도록
그래서
나도 함께 숨을 쉬고 있다.
여름의 반을 넘어섰다. 밤공기 속에 숨어든 이름 모를 꽃 향기와 풀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어느새 백색소음처럼 배경음이 되어버린 개구리들의 합창이 잦아들고 새로운 소리들이 섞여 든다(깜깜한 밤의 어둠 속에 미스터리하게 정체를 숨긴 당신은 누구요? 알고 싶다.).
휴면 상태에 들어간 모든 감각들을 잠에서 깨운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사라진다. 입과 코, 눈, 모공, 얼굴에 난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찾아내 미세한 입자들이 스며든다.
반복되는 듯해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의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일상을 새삼 다짐하게 된다.
반대를 향해 걷다
나는 속도나 거리와 같이 수치로 측정할 수 있는 기준들을 제대로 맞춰본 적이 별로 없다. 늘 내겐 그런 감각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을 하곤 했다. 건축을 시작한 이후로 내내 그런 생각을 했으니 오래된 결핍이다. 건축에서 중요한 감각일 수 있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어쩌면 개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결핍이라 느끼는 것을 결핍이라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각의 정도가 다르고 때에 따라 달라지지 않나. 절대적 수치에 수치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대신 시간과 거리, 속도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건축을 하기 이전에도 늘 정해져 있는 것의 반대편을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절대적인 것, 다수의 의견, 보통에 대한 반대를 향해 걸어온 느낌이다. 부작용도 있지만 무엇보다 짜릿하고 통쾌한 순간이 더 많다.
역시 난 아웃사이더다.
물건의 쓸모를 들여다보다
언젠가 국도변을 지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동네에서 변두리 가게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유행이 휩쓸고 지나간 물건의 재고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여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도시에서 시작된 유행의 물결이 시골에까지 가 닿을 때쯤이면 도시엔 또 다른 유행이 시작된다. 값비싼 물건도 그즈음을 지나면 가치가 떨어져 싼 물건이 된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지고 손에 들어가면서 물건의 희소성이 떨어져 뻔한 것이 된다. 유행의 가장 정점까지가 물건의 가치로 매겨진다니 참 허무한 일이다.
나는 어느새 유행의 흐름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이가 들어서 유행을 따를 만큼의 욕구가 사라진 걸까? 아니면 유행의 덧없음을 경험한 뒤 찾아오는 평정심인 걸까? 또는 개인적인 성향일까? 어찌 됐건 유행에서 벗어난 지금의 평온함이 좋다. 물건의 쓸모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물건을 어떻게 갈고닦을지 여러 상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처음 모습 그대로 낡음을 사포질해 둘 수도 있고, 다른 쓸모로 태어나게 할 수도 있고, 기호에 맞게 원하는 대로 차를 튜닝하듯이 모습을 변신하게 할 수도 있다.
대리만족처럼 물건을 리노베이션 하는 일은 즐거움과 성취감이 함께 온다. 문득 어디선가 제2의 삶을 살게 된 물건들의 함성이 희미하게 들리는 듯하다.
언어의 재인식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유학시절, 아무 의식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단어들이 프랑스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재인식을 거쳐갔다.
단어가, 문장이, 세상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졌다.
입구, 출구, 문, 창, 계단과 같이 일상과 밀접한 건축 용어들은 문장을 만들고 경험하는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곤 했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하지만 생각해 볼 수도 있던 질문과 생각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의 힘이란 언어 자체보다는 언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며칠 전 뭔가 변화가 필요한데 이제까지 하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루틴들이 전혀 먹히지 않아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가 보았다. 노트에 단어 하나를 적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작위로 적어 내려갔다. 나만의 사전을 만들듯이 단어의 의미를 확장해 나갔다.
‘길’이라는 단어 하나를 골라 사전을 펼쳐 들고 한 글자씩 새기듯이 단어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어 내려갔다.
‘길: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
나는 잠시 사전적 의미에 기대어 있을 법한 문장들을 나열해 본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사전적 의미의 바깥에 대한 생각에 가 닿는다.
사람, 동물, 자동차 그 외의 존재를 위한 길이라면?
땅 위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꼭 일정한 너비여야 하나?
길은 어떤 공간일까?
리본처럼 묶어주는 건가?
단어의 사전 속 의미를 떠올리지 않게 될 때까지 비이커 속 물에 넣어 희석하듯이 ‘길’에 대한 고정관념을 희미하게 만들어 나갔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르게 보는 것 만으로 일상은 예술처럼 특별해진다. 누구도 완벽한 담보를 가진 채 그런 특별함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새롭고자 시도하는 것만이 일상의 예술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