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조각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순간과 기억에 깃든 빛을 손끝으로 헤아린다.
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지 않는다.
조용히 우리 속으로 스며들어, 존재를 채운다.
순간들은 흘러가지 않고, 우리 안에 잔향처럼 남는다.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잃었다고 믿는 것조차 우리 안에 남아
다시 시간을 열고, 길을 이어준다.
바람 한 올, 햇살 한 겹, 고요의 그림자 속에조차
순간은 스며들고, 기억은 깃든다.
냄새와 소리에 묻은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오래 붙잡는다.
감각에 집중하면 시간이 앞뒤로 뒤섞인다.
바람과 냄새, 소리가 기억을 불러내어, 우리를 그때 그곳으로 데려간다.
지금의 공기 또한 언젠가 미래 속 과거가 되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짧은 순간들을 기록한다. 공기 속에 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한여름, 매미의 울음이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동안, 나는 그 찰나 속에 스며드는 여름을 바라본다.
누군가의 선창으로 울기 시작했다가, 다른 이의 후창으로 끝나는 매미의 시간.
우리에게는 여름의 배경이지만, 매미에게 그 순간은 삶의 절정이다.
시간의 밀도를 생각한다.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함께 여름을 건너고 있다.
비가 공기를 식히자 울음 소리는 서서히 잦아든다.
“맴, 맴… 매앰…”
사라지는 소리 앞에서 나는 묻는다.
그들의 삶은 어디에 기록될까?
오래된 나무 속, 바람이 지나간 자리,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매미의 울음은 사라지듯 공기 속에 가볍게 흩어졌다.
시간 속에 사라진 것들을 따라가다 문득, 간발의 차로 우리를 비켜간 것들을 떠올린다.
우리의 일상은 기록되지 않은 채, 각자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사이 스쳐 간 위기와 불운은 시간 속에 녹아, 도달하지 못한 미래가 된다. 비켜간 것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흘러가고, 계절이 오고 간다.
바람 한 줄기, 햇살 한 조각,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마음은 들뜨고, 새로운 생각들이 고개를 든다.
시간 속에 감각과 사유가 스며든다.
삶에는 문득 낯선 순간들이 찾아온다.
익숙한 땅이 발밑에서 미끄러지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낯섦은 언제나 삶의 결을 흔든다.
팬데믹의 시간, 침묵에 잠긴 도시와 얼어붙은 거리 속에서 사람들은 섬처럼 흩어졌다.
고립은 낯설었으나, 곧 익숙해졌다.
익숙해진다는 건 감각이 무뎌지는 일.
나는 그 무뎌짐을 거슬러, 잔상을 붙든다. 스쳐간 순간조차 내 안에 남기려 한다.
병원에서 마주한 낯섦은 한층 선명했다.
차가운 공기, 무채색의 공간, 눈부신 흰 벽, 매끈한 금속, 지나치게 밝은 빛.
그 아래에서 숨은 무거웠고, 소독약 냄새는 감각을 파고들었다.
몸과 마음은 세상과 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힌 듯 고립되었다.
작은 디테일들조차 차갑게 다가오던 순간, 깨달았다.
공간은 단순히 기능을 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흔들고, 삶의 온도를 바꾼다는 것을.
정전의 어둠 속에서 맞이한 또 다른 낯섦은 깊은 침묵이었다.
밀레니엄의 순간, 낯선 나라의 기숙사에 갇혀 고요 속에 귀 기울였다.
작은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 퍼지고, 나는 오랜만에 지나온 시간을 되짚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은 어둠 속에서 자라나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무거웠던 공기는 어느새 가벼워졌다.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가 내 감각을 서서히 일깨웠다.
불빛이 돌아온 순간, 세상은 달라 보였지만, 사실은 그대로였다.
세기의 전환을 알리던 그때, 사라질 뻔한 미래가 다시 손에 잡히듯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팬데믹의 고립, 병원의 차가운 공기, 정전의 어둠.
낯선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며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존재에 대한 물음은 메아리가 되고, 낯섦은 곧 익숙함이 된다.
남겨진 감각과 기억은 삶의 결을 더욱 선명히 새긴다.
우리는 낯섦과 익숙함을 오가며, 흩어질 듯한 순간을 붙잡고, 미래로 나아간다.
익숙했던 일상이 흔들릴 때, 불안과 새로운 감각이 함께 찾아온다.
낯섦은 변화의 문턱, 새로운 시간으로 향하는 작은 열쇠다.
냄새는 단숨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길가의 향기 하나에 과거의 누군가, 잊었던 계절, 오래전 공기가 되살아난다.
창문을 열면 익숙한 냄새가 시간을 되돌린다.
향수와 에어컨 바람이 섞인 공기 속에, 파리 지하철의 기억이 스며든다.
좋아하는 냄새가 아니어도, 나는 과거로 소환된다.
감각은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와 시간을 흔든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새벽, 작은 스튜디오에 빵 굽는 향이 번졌다.
몽롱하던 머리는 단숨에 맑아지고, 의욕이 살아났다.
따끈한 크루아상과 커피.
버터 향과 짭조름한 맛이 사라지기 전에, 커피 한 모금을 삼킨다.
작업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었지만,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기척.
창밖으로 아침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의 크루아상 냄새는 단순한 향이 아니라, 삶을 이어갈 힘이었다.
해안 절벽을 걷다, 강렬한 냄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향은 어린 시절 냇가에서 끓이던 매운탕을 떠올리게 했다.
프랑스식 생선 수프와 겹쳐진 기억 속에서, 그리움과 따뜻함이 동시에 목을 타고 올라왔다.
매운탕과 부야베스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 깊은 맛과 냄새에 쌓였던 그리움과 슬픔을 녹여냈다.
냄새는 흩어져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이 동시에 숨 쉬며, 시간은 이어진다.
숲에서 바람에 실려 온 아카시아 향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설렘을 일으킨다.
귤을 까던 순간 터져 나온 향은 방 안을 은은히 채우고, 온돌방에 앉아 귤을 까먹던 어린 시절을 불러낸다.
시간을 만난다.
풍경과 순간, 그리고 냄새 속에서.
사소한 감각이 삶의 맥박이 되고,
순간은 기억으로 깃든다.
정전 속 어둠, 크루아상의 버터 향처럼,
일상의 작은 감각들은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고
삶의 일부로 천천히 배어든다.
기억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 귀에 젖어 드는 소리, 코끝을 스치는 향기까지.
모든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감각의 언어다.
스며있다. 나의 시간 속에, 우리의 기억 속에.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다시, 나 자신과 세계를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