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조각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피터 브룩, 『빈 공간』
비어 있음은 시작이다.
텅 빈 풍경 속,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본 적 있는가?
하얗게 눈 덮인 들판. 발자국만 남았다.
무엇도 놓이지 않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곳엔 이미 가능성이 숨어 있다.
꽉 찬 일정, 만석, 솔드아웃 속에서 잠든 가능성과 달리, 비워진 자리는 숨 쉬고, 흔들리며 시작할 수 있다.
피터 브룩은 말한다. 연극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삶 또한, 우리가 그 틈에 발을 디딜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와 저기, 이것과 저것 사이의 비워진 자리. 그곳, 사이.
여백은 언제나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이제 막 열린 무대 위를 걷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듯, 풍경 속을 산책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이’에 귀 기울여 왔다.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Double Je, 두 개의 나』.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얼굴이 화면을 스쳤다. 창문 너머 스쳐간 얼굴들, 낯선 도시의 빛과 그림자.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단어로 모아졌다. ‘사이’.
그곳은 낯선 틈이자, 투명한 창이었다. 시야를 넓히고, 사고를 흔들며, 마음을 낯선 결로 빚는 자리.
외롭고 고단한 유학생활 속에서, 나는 그 빛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나는 그 틈 속에서 숨을 골랐다. 그때부터, 세상은 경계의 선으로 다시 그려졌다.
어느 한쪽에 발을 완전히 딛지 않은 채, 이곳과 저곳 사이에 서 있었다. 그 길에서 나는 나를 마주했다. 발끝 아래 아득한 경계선, 바람이 스치는 틈.
그 길 위에서 나는 잠시 서서, 사이가 주는 미묘한 떨림을 느꼈다.
세상은 수많은 ‘사이’로 이루어져 있다. 낮과 밤, 계절과 계절, 사람과 사람 사이.
저녁 빛이 창가를 스치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 방.
우리는 늘 그 틈을 지나며 살아간다.
이제, 그 경계에서 마주한 결들을 따라가 보려 한다.
# 빈 공간, 작은 호흡
한숨은 숨과 숨 사이에서 새어나온다.
답답함이 가득 차, 더 이상 채울 수 없어 흘러나오는 한숨.
어쩔 수 없으니 잠시 쉬자. 후우우우.
내보냈으니 마음에 빈 공간이 생기고, 여유가 찾아온다.
책상 앞, 새벽. 모니터의 빈 여백을 바라본다.
파일들을 ‘모두 선택’해 ‘삭제’ 버튼을 누른다.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도 일부러 틈을 둔다.
그곳에 균열이 가고, 무(無)의 세계가 펼쳐진다.
혼돈이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비어 있음은 나를 재촉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
이 틈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좁은 틈 사이로 휘파람을 불어본다. 휘이이이.
작은 소리가 책상과 벽 사이를 울리며, 공간 속 공기가 떨린다.
그 진동이 내 가슴에 파동을 남기고, 몸이 살짝 흔들린다.
틈 속에서 나와 소리가 잠시 만나고, 다시 흩어진다.
# 보이지 않는 거리
이것 아니면 저것, 문제엔 답, 예스 아니면 노, 흑과 백, 소수와 다수…
세상을 이분화하는 모든 것들을 적다 보면, 왜 분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파리 외곽의 건축학교를 오갈 때의 일이다. 외곽선(RER)을 타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던 처음 몇 주.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눈에 띄었다. 무의식중에 눈에 띄지 않으려, 못 알아들은 척,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연기했다. 걸음은 티 나지 않도록 빠르게 이어갔다. 겁이 나 비굴해지기도,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나로서 꼿꼿이 서지 못한 것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다만 조금 슬펐다.
주변 환경에 묻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동물들의 본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움츠러든 자세, 그것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마이너함이었다.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나로부터 분리해 또 다른 차별을 만든다. 세상을 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사이’가 생기고, 모두 외로워진다.
팬데믹 속 드라이브 스루, 생활치료센터, 격리 등은 모두 ‘분리’의 다른 얼굴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감이 맞지 않으면, 작은 어긋남이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소외감, 외로움, 안전함, 고독, 행복함… 분리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끝없이 다양하다.
# 흐르는 사이, 만나는 마음
홀로 태어나 홀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들도 있다. 연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
케이블 타이, 고무줄, 클립은 사물과 사물을 이어준다. 방풍실, 다리, 계단, 엘리베이터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한다. 볼트와 너트처럼 서로 맞물려 부재를 잇기도 한다. 기차 칸 사이 통로는 필요에 따라 붙였다 뗄 수 있는 가변성을 제공한다. 언젠가는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타임머신, 공간이동머신이 시간과 공간을 잇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공동체, 나와 너를 잇는 말과 문자, 글 역시 모두 연결을 위해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저 연결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 마이너와 메이저 사이
전형적인 모범생을 떠올려본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대부분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답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유지한다.
반대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무리 속에 묻혀 있는 학생이 있다.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집중력이 살아난다. 소극적이라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 못지않은 불꽃이 있다.
메이저와 마이너함은 사람 마음속에 공존한다. 주류와 비주류, 상업영화와 인디영화, 다수와 소수… 어떤 것이 우세한지에 따라 성향이 달라질 뿐이다. 완전히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은 없다. 타고남과 기질의 우열도, 좋고 나쁨도 없다. 그럼에도 사회 곳곳에는 메이저함이 바람직하고, 마이너함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스며 있다.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메이저와 마이너함을 인정해보자. 그때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가 달라진다. 마이너함을 진정 즐기려면, 메이저에 속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반대로, 메이저함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의식을 떨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에도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한결같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포장되어 우리를 현혹시킬 뿐이다. 바뀔 여지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마이너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메이저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도 문득 깨닫는다.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조금 놀라운 경험이다.
# 시간의 틈새
언젠가, 강의가 너무 지루한 나머지 유체이탈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몸은 이곳에 두고 마음은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것. 머리의 일부만 지금에 할애하고, 생각과 감각은 현실을 초월한 세계에 집중하는 시도 말이다. 잠시 이탈한다고 누가 눈치채겠는가. 오히려 해방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시간만큼 경계가 모호한 것도 없다. 가끔은 시간이 비틀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낯설고도 익숙한 데자뷔가 스칠 때도, 마치 시간이 툭 잘려 나간 듯 공백이 생길 때도 있다.
탁자 위 시계 숫자가 바뀌는 작은 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방 안의 사물들은 그대로인데, 의자 위에 놓인 옷은 허물을 벗은 뱀처럼 몸의 형태 그대로 누워 있다. 방금 지나간 초근접의 과거가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과 장소, 사람을 매개로 흔적을 남긴다.
# 낮과 밤이 스치는 자리
태양이 뜨고 지는 경계에 틈이 생긴다. 나는 방 안에서 낮이 밤으로 기울어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낮. 태양이 괘도를 따라 공간을 훑는 동안 방 안의 사물과 구석까지 생명을 얻은 듯 생동한다. 빛은 어떤 지점에서 반짝이며 머물다, 이내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마지막 햇살이 사라지면 사물과 공간의 찬란함도 함께 꺼진다.
낮과 밤을 잇는 시간이 온다. 햇빛도 조명도 약한 경계, 해 질 무렵의 저녁이다. 낮에서 밤으로 무게중심이 기울면, 존재감이 옅었던 조명이 공간에 극적인 대비를 불어넣는다. 조명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며, 낮과 밤의 전환을 자축하듯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그 시간은 짧다. 한눈을 판 것도 아닌데, 어느새 밤이 시작된다.
# 밤과 아침이 스치는 자리
각자의 일상이 펼쳐지는 밤.
모두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
만약 우리가 잠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면, 밤이란 시간이 없었다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낮 동안 어딘가에 소속된 여럿 속의 한 사람이었다면, 밤이 되면 온전히 나 자신이 된다. 누군가에게 연결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모두가 숨죽이고 자기만의 세계에 잠기는 시간.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의 고요를 사랑한다.
때로는 하고 싶은 것을 고르다 밤을 허비하기도 하고, 긴 글을 쓰다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의미 없이 사라지진 않는다. 어떤 밤은 1년보다 값진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 모든 밤이 모여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사이의 시간을 기다린다.
창을 열고 밤 풍경을 바라본다. 낮엔 숲이 보이던 창밖이, 어둠에 지워져 도시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낮과 달리, 밤은 태양의 시선을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시의 밤은 수많은 스펙트럼을 품는다. 누군가는 잠에 빠지고, 누군가는 꿈을 꾸고, 누군가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라디오를 켜는 이, 목소리를 전하는 이, 불면과 싸우는 이, 낮의 열기를 술로 식히는 이, 그리고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 듯 들뜬 이들까지.
내게 밤은 매일 다른 풍경이다. 어떤 밤은 집이 비로소 나를 받아들이는 순간을 경험했다. 또 어떤 밤은 잠 못 이루고 드라마 마지막 편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그 세상이, 그 사람이, 누군가의 말보다 더 깊이 위로했다. 또 다른 밤은 오랫동안 숙성된 생각이 문장으로 태어났다.
# 계절의 경계에 서다
이사 온 날은 3월, 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겨울 옷을 입고, 따뜻한 바닥 위에서 겨울과 봄 사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 머물렀다.
일상 속에는 계절이 섞여 들었다. 겨울 옷과 봄 옷을 번갈아 입고, 전기장판을 켰다 껐다 하며, 매일 작은 틈을 지나며 변화를 반복했다.
봄이 본격적으로 다가오자, 태양은 한 발짝씩 창가로 이동했고 그림자도 조금씩 짧아졌다. 매일의 변화는 눈에 띄지 않지만, 문득 돌아보면 시간은 저만치 흘러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 옷을 덜어내던 날, ‘아, 봄이다’라는 순간이 조용히 찾아왔다.
봄은 여름과 맞닿고, 여름은 가을과 겹쳐졌다. 두 계절의 징후가 뒤섞이며,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했지만, 문득 습하고 더운 여름으로 되돌아간 듯한 순간도 있었다. 머뭇거림과 변덕 속에서도, 여름은 확실히 가을로 기울고 있었다. 숲 속 초록 군집 사이로, 갈색의 톤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볼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아, 계절은 변해 가고 있구나’, ‘우리는 그 터닝 포인트 한가운데 서 있구나.’
며칠 전, 바닥에서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순간, 나는 양말을 꺼내 신으며 가을을 확실히 느꼈다.
계절과 계절 사이, 그 틈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변화를 감각했다.
# 집과 세계 사이, 나의 자리
하루의 루틴을 지도에 점으로 찍으면, 몇몇 장소에 점이 몰린다. 그곳을 클로즈업하면 내가 오가고 머무는 공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대로 점이 없는 곳은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해도 발걸음이 닿지 않는 영역이다.
가장 가까운 예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이다. 땅과 땅 사이에는 경계를 나누는 선이 있고, 법이 정한 간격이 있다. 최소한의 쾌적함을 위한 거리. 그러나 그곳은 대개 낭비된 채 아무것도 아닌 공간으로 남는다. 담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모습으로, 비워져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비어 있는 곳을 탐험할 수 없다.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을 자유롭게 누비는 존재가 있다. 고양이. 그들에게 소유의 개념은 없다. 원하는 곳은 집이 되고, 원하는 길은 길이 된다. 진정한 노마드. 그러나 우리의 발길은 멈춘다. 더 가면 주거침입이 되니까.
시점을 높여 항공지도로 도시를 내려다본다. 건물들은 섬처럼 흩어져 있고, 그 사이의 공간은 우리가 걸어갈 수 없을 뿐,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소리의 파동이, 냄새가, 바람이, 새가, 고양이가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나는 이 집과 저 집 사이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지만, 그 틈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감각으로 건너간다.
눈 앞에 펼쳐진 하얀 선, 발길이 선을 따라 흐른다.
막 열린 무대 위를 걷듯,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발이 흔들리지만, 곧 균형을 찾는다.
선은 긴장과 여유 사이에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발끝에 닿는 선의 결.
나는 경계 위에서 숨을 고르고,
여백이 남긴 바람을 들이마신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속에서, 나는 천천히 세계를 익힌다.
모든 틈을 지나며, 나는 풍경을 배운다.
그 찰나들이 내 안에 빛의 결을 새긴다.
문득 깨닫는다.
삶은 끝을 향한 길이 아니라,
무수한 사이가 이어 붙인 빛의 파편이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사이를 걷는다.
그 끝이 없음을 알기에, 더 깊이, 더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