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 Sep 27. 2022

여기와 저기, 그 사이에 나는 있네

그 시선들…


열여덟 번째 세계,

언젠가 TV에서 ‘Double Je’(이중의 나, 두 개의 나)라는 방송을 봤을 때였지. 다른 국적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그들에겐 공통적인 정서가 있었지.

‘사이’에 있는 감각.

때론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때론 시야가 넓어지고 유연해지고 새로워지지. 그들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했고, 외롭고 힘든 유학생활에 빛과도 같은 순간이 되었지. 그렇게 우연히 내게 맞는 깨달음이 때마침 찾아왔던 것일 수도 있고, 원래부터 ‘사이’에 있는 감각에 예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마도 그즈음부터 세상을 ‘사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을 거야.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은 채, 이곳과 저곳에 서 있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중첩된 풍경, 중첩된 마음. _ BGM # Nightmares | Easy Life


2022년 9월

숨과 숨 사이, 한 숨

한 숨이 숨과 숨 사이에서 새어 나온다.

답답함이 가득 차 더 이상 채울 수 없어

밖으로 나오게 되는 한 숨.

어쩔 수 없으니 쉬고 보자.

휴우우우.

내보냈으니 일단 다시 마음에 빈 공간이 생겨

여유가 생긴다.



비워진 곳, 사이

팽팽하게 조여진 현, 꽉 조여진 나사, 빈 틈 없이 채워진 옥수수 알, 가득 찬 주차장, 만석, 솔드아웃……

이미 채워져 완성된 것들에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능성이 잠재워지고 비전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채워진 것보다 비워진 풍경에서 나는 가능성을 본다.

여기와 저기, 이것과 저것이 이루는 ‘사이’.

비워진 그곳.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_[빈 공간], 피터 브룩


책상 앞. 새벽. 모니터의 빈 여백을 바라본다.

파일들을 ‘모두 선택’해 ‘삭제’ 버튼을 누른다.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일부러 빈 틈을 준다.

그곳에 균열이 가고

무(無)의 세계가 펼쳐진다.

혼돈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비어 있음’이 나를 재촉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서로 다른 두 존재를 의식하면 그곳에 ‘사이’가 생겨난다.

모든 단어에 양면성이 있겠지만 이 단어만큼 그 의미가 어울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사이는 두 존재간의 거리다. 그 안에 공간이 만들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홍해를 가르듯이 경계를 따라 다같이 일보후퇴. _ BGM # Daydreams | Easy Life


세상을 분리하는 ‘사이’

이것 아니면 저것, 문제엔 답, 예스 아니면 노, 흑과 백, 소수와 다수…… 세상을 이분화하는 것들을 적다 보니 어떤 이유에서 분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파리 외곽에 있던 건축학교를 오갈 때의 일이다. 외곽선(RER)을 타는 것 자체만으로 처음 몇 주간은 긴장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눈에 띄긴 했다.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무의식 중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려 했던 것 같다. 나를 향해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못 알아들은 척,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연기를 하곤 했다. 걸음은 티 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템포를 이어나갔다. 겁이 나서 비굴해지기도, 움츠려 들기도, 내가 나인 채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없었다. 사실 당당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다만 조금 슬펐다. 주변의 환경에 묻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동물들의 본능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움츠러들었던 그 자세, 그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마이너 함이었다. ‘다르다’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그들이 내게 같은 이유로 그들로부터 분리해 또 다른 차별을 가한다. 그곳에서 불평등이 생겨나는데 가해자는 의식이 없고 피해자만이 의식을 한다. 세상을 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사이’를 만들고 모두 섬처럼 외로워진다.

또 다른 관점에서 ‘사이’는 위험을 대비하고 불편을 개선하고 서로를 위한 일이 되기도 한다. 팬데믹 상황에 등장한 드라이브 스루, 워크 스루, 생활치료센터 격리, 코로나 전담 병원,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자가격리까지 모두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서로를 분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나와 타인과의 거리감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오는 작은 어긋남은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

소외감, 외로움, 안전함, 고독, 행복함……

세상을 분리함으로써 갖게 되는 감정들이 참 많다.



세상을 연결하는 ‘사이’

홀로 태어나 홀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들도 있다.

연결하기 위해 태어난 모든 존재들.

케이블 타이, 고무줄, 클립은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고, 방풍실, 다리, 에어 로크, 계단, 엘리베이터는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한다. 볼트와 너트처럼 한 쌍이 되어 두 개의 부재를 연결할 수도 있다. 기차의 칸과 칸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는 필요에 따라 붙이고 뺄 수 있는 가변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타임머신과 공간 이동 머신은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 줄 것이다. 근미래에.

좀 더 추상적인 방향으로 범위를 확장하다 보면 끝도 없이 많다.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공동체, 나와 너 사이를 연결하는 말과 문자들 그리고 글까지도.

이 모든 것이 연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마이너와 메이저 사이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대부분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답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모범적이지 않은 한 학생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무리 속에서 묻혀있고 싶다.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집중력이 살아난다. 소극적이라 사람들이 말하지만 내 안엔 누구 못지않은 불꽃이 있다. ”


메이저와 마이너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존한다. 주류와 비주류, 상업영화와 인디영화, 다수와 소수, 어떤 것이 우세한 지에 따라 성향이 달라질 뿐이다. 완벽히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은 없다. 타고남과 기질에 잘잘못도, 우위도 없는 것인데 메이저함이 바람직하고 마이너함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고정관념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스며있다.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메이저와 마이너함을 인정해보자. 그런 다음에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마이너함을 진정 즐기기 위해서는 메이저에 속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함을 놓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대로 메이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의식을 떨쳐야 메이저함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고 스스로에게 갖는 고정관념에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한결같을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이 미덕인 것처럼 포장해 우리를 현혹시켰을 뿐이다. 바뀔 여지는 언제라도, 어디에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마이너 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메이저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문득 새로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깨닫게 된다.



시간의 틈

언젠가 강의가 너무 지루한 나머지 유체이탈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현실과의 거리를 둔 채 몸은 이곳에 두고 마음은 바깥을 향하게 하는 것. 머리의 일부만 지금 이곳에 할애한 채 생각과 마음을 온통 현실을 초월한 세계에 집중하는 그런 시도 말이다. 잠시 이탈한다고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만큼 경계가 모호한 것도 없다. 시간이 어딘가 비틀린 것 같은 감각이 들 때가 있다. 낯설면서도 친숙한 데자뷔의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시간이 툭 잘려 나간 듯할 때도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작은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방 안의 모든 사물들은 그대로인데 의자 위에 놓인 옷은 허물을 벗고 나온 뱀처럼 몸의 형태 그대로 누워있다. 방금 막 지나간 초 근접의 과거가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과 장소, 사람에 의해 감지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난다.


밤으로 가는 길목, 붉은 흔적을 남기고 낮은 떠나갔네. _ BGM # A Thousand Eyes  | Sarah Kang


낮과 밤 사이, 저녁

태양이 뜨고 지는 경계를 기준으로 시간에 틈이 생긴다. 방 안에 머물며 낮이 밤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낮. 태양이 괘도를 따라 공간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 방 안의 사물들과 공간의 구석, 가장자리까지 모두 생명을 얻은 듯 생동감이 넘친다. 빛은 어떤 특정한 지점에서 광채를 드러내며 반짝이다 조용히 방 안에 머문다. 태양의 마지막 끝자락이 지나가고 나면 사물과 공간의 그 찬란함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린다.

낮과 밤을 끊김 없이 잇는 시간이 왔다. 햇빛도 조명도 약한 낮과 밤 사이의 시간, 해 질 무렵 저녁이다. 낮에서 밤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지면 존재감이 옅었던 조명이 공간에 극적인 대비를 불어넣기 시작한다. 조명의 진가가 장소 속에 빛을 발한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순간, 낮과 밤의 전환을 자축하듯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그 사이의 시간은 짧다. 한눈을 판 것도 아닌데 어느새 밤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아침이 밤을 밀어내고 빛을 드러낸 그 경계의 순간을 나는 목격했네. _ BGM # Summer is for falling in love  | Sarah Kan


저녁과 아침 사이, 밤.

각자의 일상이 펼쳐지는 밤의 시간들.

모두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

만약 우리가 잠이 필요 없는 존재였다면…… 밤이라는 어둠의 시간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일상이 팍팍해져 온다. 낮 동안 어딘가에 소속된 여럿 속의 한 사람이었다면, 밤이 되면 온전히 나 자신이 된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고, 누군가와 연결될 필요가 없는 자기만의 온전한 시간. 모두가 숨죽이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기에 좋은 시간이다. 낮보다도 더 명료하게 깨어 홀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시간을 나는 즐긴다. 내가 아침 형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때로는 하고 싶은 것을 고르다가 밤이 지나가버리기도 하고, 감성 충만한 긴 글을 쓰다가 모두 지워버리는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밤의 시간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밤은 1년의 시간보다 더 값진 깨달음을 얻곤 한다. 그런 모든 밤이 모여 나의 일부를 이룬다. 그래서 늘 밤이라는 사이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창문을 열고 밤 풍경을 바라본다. 숲이 보이는 낮 풍경에 비해 어둠에 숲이 지워져 버린 밤은 도시의 풍경에 조금 더 가깝다. 모든 것이 오롯이 드러나는 낮에 비해 태양으로부터 벗어나 어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달콤한 잠에 빠진 채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는 심란한 꿈을 꾸는 중이고, 누군가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는 라디오를 듣고 누군가는 목소리를 전한다. 또 누군가는 불면과 싸우며 불면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고, 누군가는 낮의 열기를 술 한잔으로 식히고, 누군가는 지금 막 하루가 시작된 것처럼 들떠있기도 하다.

내게 매일의 밤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어떤 밤은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집에 비로소 스며든 느낌을 경험했다. 집이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집을 받아들여 서로 통하는 순간이었다. 또 어떤 밤은 피곤한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즐겨보는 드라마 마지막 편을 보며 눈물을 뽑고 잠에 들었다. 드라마 속 세상이, 사람이 너무 따뜻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보다 더 위로가 됐다. 또 다른 어떤 밤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생각들이 흘러나와 비로소 하나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계절과 계절 사이

이사 왔을 때가 3월, 봄이었다. 하지만 아직 겨울 옷을 입고 따뜻한 바닥이 기분 좋은 겨울과 봄 사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있었다. 일상에 계절이 뒤섞여 들었다. 겨울과 봄 옷을 번갈아 입었다가 전기장판을 넣었다가 다시 꺼내고를 반복했다.

[……]

계절이 본격적으로 봄이 되어가며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햇빛은 한 발짝 창가로 움직인 듯했고, 그림자도 짧아진 듯했다. 매일매일의 변화는 알 수 없지만 문득 깨닫고 보면 저만치 움직인 것이 감지되곤 했다. 겨울 옷을 꺼내는 날이 줄어들어 갈 무렵 ‘아, 봄이다.’하는 순간이 명징하게 와닿았다.

[……]

봄은 다시 봄과 여름 사이로 그리고 여름을 지나 여름과 가을 사이에 와 있다. 두 계절 모두의 징후들이 변덕스럽게 오고 간다. 하늘은 높고 바람이 선선해 ‘이제 가을이다!’ 몇 번을 반복해서 외쳐댔는데 문득 습하고 더운 여름으로 회귀한 듯했다. 하지만 머뭇거림, 미련, 변덕을 오가는 날씨 속에서도 여름은 가을로 확실히 가고 있었다.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색이 초록색의 군집이었다면 그 안에 갈색의 톤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볼에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아, 계절이 바뀌어 가는구나’, ‘우리는 그 터닝 포인트의 한 때에 있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

며칠 전 문득 확실하게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감지했다. 바닥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져 양말을 꺼내 신었다.



이 집과 저 집, 그 사이

하루 동안의 루틴을 지도에 점으로 표시해 본다면 몇몇 장소들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점들이 집중포화된 곳을 클로즈업해 보면 내가 어떤 장소들을 오고 가고 머무는지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반대로 표시가 적은 곳은 접근이 불가능한 곳, 접근은 가능하지만 발걸음이 향하지 않는 곳, 누구의 영역인지 모호해 가지 않는 곳들일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찾아본다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일 것이다. 땅과 땅 사이에는 경계를 나누는 대지 경계선이 있고, 기본적으로는 담의 형태로 구획되어 사이는 비워져 있다. 서로에게 최소한의 쾌적한 환경을 주기 위해 법적으로 만든 간격, 거리, 최소한의 비움이다. 하지만 그곳은 낭비된 채 아무것도 아닌 곳이 돼버리기 일쑤다. 담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닮은 모습으로 나란히 비워져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매우 드라이하고 재미없는 모습으로 그곳을 점유하고 있다.

비어있음에도 우리는 그곳을 탐험할 수 없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기본적으로 사유지다. 그것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있다면 고양이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그곳이 사유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그들에게 장소는 소유의 개념이 개입되지 않는다. 원하는 곳 어디든 집이 되고 원하는 길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진정한 노마드 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발 길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더 앞으로 나아가면 주거 침입이 될 수도 있으니.

대신 시점을 바꿔 항공지도로 도시를 위에서 바라보았다.

건물들은 점점이 섬처럼 땅 위에 박혀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비움의 공간들은 우리가 걸어서 자유롭게 통과하지 못할 뿐 어떤 면에서는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소리의 파장이 멀리 퍼져나가고, 냄새가 흘러 다니고, 바람이 불고, 새가 드나들고, 고양이가 유연하게 그곳을 통과해 나간다.

나는 이 집과 저 집 사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지만,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그 사이를 감각한다.

이전 17화 남들과 다른 무엇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