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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세계의 틈

열한 번째 조각

by 귀리

중심, 여백 사이 풍경


한 그루 나무를 떠올린다. 사방으로 뻗어 바람을 맞고, 햇빛을 받고,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그 모든 움직임은 결국 깊이 내려앉은 뿌리에서 비롯된다.

당신 세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요?
그 질문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렀다.

나의 중심에는 늘 건축이 있었다. 작업의 바운더리 안에서만 맴돌던 구심력 강한 일상. 그 속에서 바깥 세상에는 무심했고, 중심은 점점 무거워지며 갈 곳을 잃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중심은 단단하지만 동시에 유연하며, 그 안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여백이 숨어 있다는 것을.

중심에서 한 발 벗어나 바깥을 마주할 때, 발끝에 스치는 바람이 살랑, 귀를 맴도는 새소리가 찌르르, 햇살에 반짝이는 먼지 알갱이, 낙엽 밟는 소리가 바스락 선명하게 다가왔다.

작은 틈은 중심을 흔들면서도 중심을 오히려 가볍게 만든다.

한겨울에 녹아버린 눈을 다시 얼릴 수 없듯, 중심에서의 이탈은 언제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마치 나무가 한쪽 가지를 잃고 그 자리를 다른 가지로 채우듯, 중심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그 변화 속에 반전의 쾌감과 자유로움이 생겨난다.
내 안의 중심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 안에서 나만의 길을 발견한다. 바람 한 줄기를 위해 중심을 비우고, 자리를 내어 다른 무언가가 스며들도록 한다. 서서히 다가올 또 다른 중심을 기다리며.


당신의 중심은 지금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요?

중심에서 비껴난 시선은 결국 나만의 리듬을 만들고, 그것은 곧 시그니처로 이어졌다.



시그니처, 자기만의 서사


중심에 서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그 경계를 넘어 주변을 살폈다.
모니터의 미세한 빛이 방 구석에 살짝 스며들고, 바람에 흔들린 커튼이 바닥 위에 그림자를 흘려놓는다. 그림자 하나, 잎사귀 하나에도 마음이 붙잡히고, 시선은 다른 길을 찾아간다.

흔들림은 곧 새로운 호흡이 된다. 시간이 쌓이며 그 호흡은 나만의 결, 나만의 서사, 곧 시그니처가 되었다.

푸코가 말했듯, 모든 사람은 고유한 서사를 지니고, 그 서사 자체가 곧 시그니처다.
내 시그니처는 단순한 취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발걸음의 템포, 시간을 다루는 방식, 혼자일 때 느끼는 떨림, 숨을 고르는 리듬까지 포함된다.

마치 나무의 가지가 바람과 햇빛, 계절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고 구부러지듯, 나의 움직임과 선택도 그때그때 달라진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업데이트를 하고, 조금 빠르게 극장에 도착한다. 누군가 다 떠난 자리에 홀로 열광하고, 때로는 오래 돌아 나만의 타이밍에 닿는다.

다프트 펑크의 음악에 빠져 새벽을 지새우고, 2021년에야 그들을 만났다. 느림과 빠름, 반복과 변주 속에서 나는 내 리듬을 연주한다.

작업 속에서도 나는 미세한 한 끗을 추적한다. 디자인의 1% 차이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하나를 더하거나 빼고, 질감을 얹고, 마지막 순간 반전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 작은 차이가 때로는 어떤 화려한 요소보다 강렬하다.

어쩌면 나의 시그니처는 의도된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축적된 시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조각이 모여, 나는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당신의 시그니처는 어떤 모습인가요?

시그니처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늘 내가 발 딛고 선 세계, 곧 백그라운드와 맞닿아 있다.



백그라운드, 나를 둘러싼 세계


“세상은 내가 만든 거울이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비친다.”


방을 빙 둘러본다. 벽과 가구, 오래 함께한 물건과 최근 자리한 것들이 묘한 화음을 이룬다.
무채색 속 노란빛, 책상 위의 SF 소설, 초록빛 스탠드, 벽에 붙은 메모들.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나의 일부다.

문을 열면 집 전체가 드러난다. 단순한 구조지만, 누군가 살아 점유하는 순간 그곳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창밖으로는 동서남북이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도시의 빌딩, 병풍처럼 둘러선 산맥, 옆집의 벽, 오래된 기와지붕.

계절이 깊어지며 풍경은 달라진다. 겨울이 오면 나무는 잎을 벗고, 화면은 수묵화처럼 단순해진다.

현관을 나서 적막한 골목을 걷는다. 계절의 흔적이 동네 구석구석 스민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비워진 화분, 저녁빛에 물든 나무 가지,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나뭇잎까지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나의 백그라운드를 이룬다.

백그라운드는 사물과 풍경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제 만난 사람의 말, 우연히 스친 음악, 오래된 책의 문장. 그것들 역시 나를 만든다. 소리, 색, 질감, 공기. 나는 그 속에서 시간을 기록하고, 숨을 고르고, 마음을 놓는다.

풍경과 사물은 결국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을 들여다볼 때, 나는 백그라운드 속의 나를 마주한다.

마치 숲 속의 나무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빛과 바람을 나누듯, 나의 세계도 수많은 층과 순간이 맞닿아 나를 만든다.



백그라운드 속의 나


이제 안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를 둘러싼 백그라운드는 결국 내 안의 기준으로부터 비롯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과 우연히 다가온 것.
그 층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마치 나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나이테를 쌓듯, 경험과 기억이 단단히 겹쳐진다.
영화 속 빛과 그림자, 책의 종이 향과 글자 소리, 만남과 이별의 떨림, 우연히 스친 음악과 도시의 바람, 발자국이 남긴 골목의 울림.
모든 경험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업데이트된다. 그 순간마다 다른 얼굴을 띠며, 새로운 백그라운드를 만들어낸다.
낡은 사진 속 장면처럼, 지나간 기억들이 속삭이고, 현재의 선택이 조용히 흔들린다.
그 모든 것이 맞물려 흐르고, 서로 스며들어, 마침내 나는 중심도 경계도 없는 틈으로 스며든다.



틈, 경계 없는 그곳


중심, 시그니처, 백그라운드는 맞물리며 나를 움직인다.
그 사이, 틈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감각한다.

돌바닥의 질감, 창틈의 바람, 햇살이 남긴 따스함, 바닥에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 흙 냄새와 나무 수액의 향기까지.
삶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선택과 우연, 순간과 풍경이 겹겹이 쌓여 만든 구조다.

그 안에서 나는 안다.
중심도, 시그니처도, 백그라운드도 경계 없이 흐른다는 것을.

나는 그 틈을 걷는다.

마침내 숲을 떠올린다. 각 나무의 뿌리와 가지가 서로 얽히고, 그림자를 드리우며, 바람과 햇빛을 나누듯, 나의 중심, 시그니처, 백그라운드도 서로 맞닿아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리고 그곳에서 끝없이 변하는 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끝이 없음을 알기에, 더 깊이, 더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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