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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Sep 09. 2021

남들과 다른 무엇

열일곱 번째 세계


남들과 다른 나만의 시그니쳐 같은 것.

생각해 본 적 있어? 그건 어디에서 올까?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 아닐까 생각했지. 조금씩, 하루하루 쌓여 남들과 다른 무엇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일상의 해프닝과 습관에서부터 그 사람이 살아온 모든 히스토리까지 포함한 그 모든 게 그 사람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시그니쳐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렇다면 나의 사소한 ‘남들과 다른 무엇’은 어떤 게 있을까? 그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답을 얻게 되지 않을까 싶어.



2021년 9월

남들과 다른 템포로 빠지다

뉴스는 요즘 서로 앞다투어 작정하고 비관적이다. 뉴스로 내 하루가 비관적인 마음으로 시작할 수는 없으니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던 버릇을 버리기로 했다. 대체로 아침에 한번 건너뛰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던 거였다.

얼마 전부터 다프트 펑크의 음악을 들으며 우주적인 아침을 보내는 중이다. 그들이 유럽의 클럽들을 장악하고 있던 그 시절, 나는 400km 떨어진 곳에서 그들과 전혀 무관하게 내 갈 길을 가고 있던 중이었다. 티브이에 검은 헬멧을 쓰고 나온 두 남자를 보며 픽 바람 빠지게 웃었던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이런, 이럴 수는 없다, 그렇게 넘길 순간이 분명 아니었다! 예사롭지 않은 그 느낌을 그땐 못 받았다는 건가?

나는 코앞에서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놓쳐버렸다. 그 시절 내 음악 취향은 잡식이었다.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경계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잡식했다. 시를 읊조리는 듯 지적이고 우아한 프랑스 음악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국 음악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다양한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다 보니 구할 수 있는 음악을 듣게 되는 식이었다. 그때의 음악들을 들으면 지금의 취향에선 벗어나지만 그 시간을 함께 보냈던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때 내게 전자음악은 바운더리 밖에 있었다. 알지 못하면 좋아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왜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알게 되는 것인지, 그때는 코웃음으로 얼버무렸던 내가 이토록 열광하고 있는지 인생 참 알 수 없다.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관심 밖의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런 깨달음으로 삶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모든 게 반전될 수 있는 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늘 남들과 다른 템포로 뭔가에 빠져 남들이 다 떠난 자리에서 볼을 붉히며 홀로 서 있곤 한다.

길게 돌고 돌아 2021년 지금 여기에서 그들을 만난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너무나 그들 다운 방식으로 떠나고 없다. 그것도 바로 몇 달 전, 멋진 안녕을 고하고 시크하게. 간발의 차이로 나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는 아티스트와 공존하는 기회를 잃었다. 모두 열광하던 콘서트장이 텅 빈 채 썰렁함의 메아리를 울리고 있는 듯하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허전함에 고성능 헤드폰을 끼고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려나?

나는 그렇게 모두가 떠난 자리에서, 지금 홀로 열광한다.

다프트 펑크의 음악에. 이제야 알았냐고 누군가는 핀잔을 줄지라도 굴하지 않고 나는 지금 좋다. 어차피 예술은 시간을 뛰어넘는 것을. 좋아하는데 시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텅 빈 공간에 대고 외쳐댄다.

나도 모르게 놓친 선택이 시간이 지나 다시 내게 돌아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아량을 베푼다.


Within을 들으며 시작하는 아침. 우주 같은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이미징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은 평온해진다.

아, 한 곡 더.

Something about us.

레츠고 우주 원 모어 타임!



아주 미세한 한 끗 차이

작가들이 가끔 필명으로 다른 류의 소설에 도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한 참 지나고 나서야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알려지지 않아선지 실패한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 대부분 실패는 알려지지 않고 성공은 알려지기 마련이니까.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작업하고 그와 함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디자인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새로운 걸 해 보겠다고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내듯이 이런저런 시도를 했는데 모두가 다 누구의 작품인지 알겠다는 듯이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반응을 할 때가 있다. 그건 마치 목소리 변조를 하는 기계에 대고 자신이 아닌 척 이야기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눈치챌 만큼 명백한 그런 상황 같다고나 할까. 누가 봐도 그의 작업이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변신을 하는데 그만큼 리스크도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지고 장르가 달라졌는데도 자기 스타일을 유지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좋게 또는 식상하게 받아들이는 기준은 어쩌면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아주 큰 한 끝일 것이다. 결국은 디자인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디자인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것만큼은 접어두자. 그것마저 잘한다면 그건 천재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동시에 몇 명의 천재가 나올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천재 서너 명이 이미 존재하므로 우리는 천재가 아니니 안심하고 사람 마음을 꿰뚫는 노하우가 부족해도 속상해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나 디자인이든 일이든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고 가끔씩 그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는 경험은 서로 말하지 않아서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실패한 디자인은 어디에나 있다.

아주 미세한 한 끝 차이로 디자인은 다르게 평가된다. 49:51 같은 간발의 차이로 성공과 실패에 서게 되는 것이다. 1프로의 재능과 1프로의 운이 평소보다 조금 더 혹은 덜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운은 맡긴다 해도 1프로의 재능이란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 차이를 만들어 내기까지가 어려운 것이다.

아주 미세한 한 끗 차이를.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조금 빠르게

프로그램 업그레이드 타이밍을 놓쳐 계속 사용하게 될 때가 있다. 버티다 못해 바꾼 가장 최신 버전의 업그레이드된 기능을 훑어보다 보면 익숙해진 버전을 사용하는 동안 얼마나 삽질을 하고 있었던 건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곤 한다. 다른 건 다 빠르게 바꾸어도 끝까지 버틸 때까지 버티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 습관은 알면서도 고치기 어렵다.

남들보다 느리게 한 발짝 늦게 걷게 되는 것들이 사람마다 한 두 개씩 있기 마련이다. 이제까지의 느린 발걸음들을 종합해 보면, 나는 불편을 불편해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꼭 마지막의 마지막에 바꾼다.

하지만 반복되는 건 정말 견뎌내기 어려워 남들보다 몇 걸음 앞서 나간다. 거의 매일 새로운 음악을 들어보며 가지의 가지를 쳐나가는 것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영화는 늘 신작 소식을 보며 개봉하자마자 달려가 보곤 한다.

모두 그렇게 각자 자기만의 템포가 있다. 그리고 그 템포 속에 취향과 습관을 포함한 그 사람이 스며있다.



상식, 상대적 관점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

“그 사람은 상식과는 먼 사람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건 있을 수 없는 얘기야.”


상식은 자기를 중심에 놓은 채 경험에 기반한 개념의 단어다. 국가나 지역에 따라 집마다 개인마다 기준이 다르다.

누가 옳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상식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모호한 것에 O, X를 표시하라고 하는 문제와도 같다. 처음부터 합리적인 토대 위에 견고하게 쌓은 탑이 아니다.

사회적 약속과 관습, 집마다 다르게 쌓아 올린 상식의 기준들을 서로 옳다고 주장하다가 낯선 이국의 땅에 서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이제껏 살면서 쌓아 올린 상식의 세계는 이토록 연약하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 속에 숨어있는 태생적인 모순들이 그제야 보이는 것이다.

상식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나 다르게 적용된다. 물론 사람 사는 게 비슷한 구석이 있어 공통의 기준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선 맞지만 저곳에선 틀리고 또 다른 곳에선 관심조차 없는 것들이 있다.

머릿속에 박힌 상식의 고정관념들을 고개를 흔들어 탈탈 털어낸다. 그래도 남아있다면 웁스의 어깻짓을 하며 ‘미안하지만 이젠 안녕!’이라고 상식에게 이별을 못 박을 수밖에. 그렇게 모두 비워내 어디에도 메어있지 않은 순수한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보면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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