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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Aug 24. 2021

스며있네, 나의 시간들 속에

그 시간들…


두 번째 세계,

감각에 예민하게 집중할 때면 시간이 앞으로 뒤로 섞여 들 때가 있어. 그때의 바람, 냄새, 소리가 기억을 재생해 그 시간과 장소로 우리를 함께 소환하곤 하지.
그럴 땐 멍하니 그곳에 홀로 머물다 오게 돼.
마찬가지로 지금의 소리와 바람과 냄새 같은 것들이 미래 속 과거가 되어 기억이 재생될 테지.
이 짧은 순간들을 기록해 놓을까 해.
공기 중에 시간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2021년 8월

광장 위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어. _ BGM # Eydis Evensen | Brotin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한 순간 누군가의 선창으로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가 누군가의 후창으로 끝이 나는 매미의 시간.

긴긴 여름의 시간이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간 몇십 년의 여름 속에서도 늘 매미의 시작과 끝을 인식하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너무 흔한 계절의 의식이라 잘 기억이 안 날뿐.

매미의 삶이 시작하고 또 마칠 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우리에게는 잠시 스쳐갈 여름 한 때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그 시간의 밀도는 사람의 몇 백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 기준의 시간도 우주 앞에서는 아주 찰나의 시간일 뿐이지만, 우리에겐 참 길(고도 짧)다.

그 상대적인 시간 속에 우리, 사람과 매미는 서로 공존하며 비가 조용히 대기의 온도를 뚝뚝 떨어뜨리는 여름 끝, 가을 시작에 있다. 이 비가 그치면 내일은 어쩌면 매미의 흔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급격히 줄어든다.

맴. 맴.. 맴…매앰… 매……

그들의 인생이 기록되었다면 어딘가에 소설처럼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집 앞 오래된 나무 안쪽에 뭔가가 남아있으려나, 해마다 그 나무에서 살다 간 매미가 우리 동네를 살다 간 사람보다 많지 않을까, 사라져 간 모든 매미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당신의 마지막 장면이다.’ 배우에게 감독은 마지막 신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들은 클라이막스를 맞이하며 서서히 마무리되기 시작한다. 현실의 삶에서 클라이막스는 인생의 마지막에 거꾸로 되짚어보니 ‘아, 그때가 내 인생 클라이막스구나.’라고 생각될 것이다.

지금 매미는 클라이막스를 지나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그들을 위한 음악을 하나 띄우고 싶다.

어디로 신청? 글쎄, 하지만 그럼에도.

한 여름 새벽, 열창을 했던 그들을 미워했던 마음이 그새 잊혀진 게 분명하지만, 한 여름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떼창을 좋아하는 그들의 취향을 담아

[콜드플레이(Coldplay)의 Fix You].



비켜간 타이밍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형성된 ‘나’라는 태아가 건강하게 태어나 모든 큰 위기를 비켜가며 좋아하는 일을 찾고 살아가는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순간순간의 힘듦과 고통, 짜증, 화남, 이런 것들의 무게가 갑자기 확 쪼그라드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나를 비켜간 모든 불행은 아주 간발의 차이로 나를 비켜가 어딘가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 순간순간을 누군가 다큐로 찍고 있지 않는 한 나는 알 수 없다. 공평하게도 모든 사람의 일상은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채 사람들 각자의 기억과 생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사라진 불행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모른 척 살아갈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말하고 싶다.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이

우리를 모두 비켜갔음을.

사라진 불행에 감사하다고.

비켜가서 다행이라고.



계절이 오고 가는 길목

지구는 여전한 속도로 자전하고 있고, 그 속도에 맞게 하늘이 나를 반대방향으로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지구 위에 올라탄 채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이다.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태우고 제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지구는 돌고 돈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하나의 계절이 오고 간다.


레몬 한 조각과 애플민트 한 잎을 넣은 물의 청량함이 늦여름의 더위에 희망을 불어넣는다. 나는 이 계절의 오고 감의 사이에서 밀당을 하며 새로움을 찾는 걸 좋아한다.

시원한 바람 한줄기, 눈부신 햇살, 또 가끔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 무엇보다 사람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 21도에 가까운 날씨. 그것만으로 너무 쉽게 기분이 업되어 크리에이티브한 생각이 시동을 걸어댈 것만 같다. 이 계절과 계절 사이는 이렇게 기분 좋은 예감의 신호가 사방에서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뭘 해도 될 날씨긴 하다.



시간을 되돌리는 냄새

창문 사이로 들어온 공기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가 난다. 향수 냄새와 에어컨 실외기의 축축한 냄새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듯하다. 아니면 그리운 마음이 순간 착각을 일으킨 건지도 모르고. 어쩌다가 조합된 ‘파리 지하철 냄새’가 방 안을 채운다.

분명 순수하게 좋아하는 냄새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데도 이런저런 기억에 냄새가 깊게 스며들어 단번에 기억들을 재소환한다. 기억은 두리뭉실 덩어리의 형태로 오거나 조각난 파편으로 냄새에 실려온다.


아, 그립구나.


사람의 감각은 참 신비롭다. ‘데자뷔’라고 느끼는 순간은 감각들이 풀가동하며 과거의 어떤 상황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아, 이게 뭐였지?라고. 뇌와 우리 몸이 하는 일을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섬세하게 연결되어 의외의 상황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서프라이즈’

하며 박스에서 튀어나온 선물 같은 뭐 그런 건가?

그럼 감사히 잘 받아야겠지.


시간을 되돌려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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