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 Nov 23. 2021

나의 모든 '너'에게

첫 번째 세계

편지를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어느 날 새벽 펜을 들었지. 내 안에 깊숙이 쌓여가는 생각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기 전에.


생각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
네가 있는 곳까지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 곳에 너를 초대할게. _ BGM # IknowhowIfeel | Parcels


며칠 전 ‘무민’ 작가 토베 얀손을 다룬 영화를 봤어.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지. 주인공이 작업하던 그림이 클로즈업되고, 어떤 그림을 그리냐고 묻는 친구에게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전기 영화의 끝을 시작으로 끝내다니! 자기만의 작업을 위한 시작을 의미하는 거겠지. 전기 영화는 대부분 성공의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주인공의 삶은 계속 이어지잖아. 세상의 모든 시작엔 과정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 뒤에 또 다른 이야기가 흘러가지. 그 이야기들이 생략된 시작과 결과는 어쩌면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오랜만에 너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몇 가지 안부에 가까운 말들로 대화가 이어지다가 끝나면 뭔가 늘 허전하곤 했지.

과정이 빠진 이야기는 장마 끝 과일의 싱거운 맛처럼 허전하다고 해야 할까? 왠지 소금이라도 쳐야 할 것처럼. 하지만 애써 꾸민다고 해서 예전의 충만한 대화가 이어질리는 없겠지. 늘 우리 사이에 과정이 빠진 이야기들이 헛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답했어. 그런 매일이 지속되다 보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어 그 모든 이야기들이 갈 곳을 잃고 표류 중이었지. 지금 이 순간 전하지 못하는 생각과 마음이 아쉽고 그리웠어. 서로 공감하며 보냈던 수많은 밤과 새벽과 아침과 오후의 시간들 속에 남겨진 우리가 한 때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지. 그래 맞아. 아무리 우리가 한 때 서로 공감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해도 그때의 우리는 그곳에 둔 채로 각자 뒤돌아서 다음을 향해 걸어 나왔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삶의 바운더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요즘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이야기한들 잘 와닿지 않겠지. 그 관심에 대한 모든 히스토리를 시간 순서대로 읊어대며 설명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그 갭을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기에 삶은 참 복합적이지.

어느 날 우연히 글로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더니 표현의 갈증이 뒤늦게 실감 나더라. 그래서 나의 모든 ‘너’에게 편지를 쓰려는 거야. 아주 사소하고 단편적이지만 놓치기 아쉬운 말들에 관해. 그 시절의 ‘너’는 이곳에 없으니 종이 위에 다시 소환해 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펼쳐보려는 거지. 여행을 하며 즉흥적으로 보내는 엽서처럼 답장을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니라 그저 언젠가 편지가 너에게 닿는다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영화에 가끔 그런 장면 있잖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한 시간을 머금은 빛바랜 편지 같은 그런.

때로는 말하듯이 편지로, 때로는 독백처럼 일기로, 때로는 진지하게 에세이로. 편지는 너와 나 사이를 좁히고, 일기는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고, 에세이는 생각의 깊이를 더하지. ‘너’와 ‘나’와의 대화뿐 아니라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대화이기도 했어. 오늘과 어제의 생각은 다르고, 머무는 장소가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지. 한 번에 적어 내려가는 글이 아닌 며칠, 몇 달이고 조금씩 끄적이는 글들을 모아 서로 어긋나고 상충되는 생각들을 너와 이야기하듯이 때론 한 밤 중의 일기처럼 이어나갔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하는 말처럼 시점이 어긋난 독백이 이어졌지. 어쩌면 이전의 나에 대한 후렴구 같은 것인지도… 대체로 비슷한 듯 후렴구처럼 반복되지만 길게 두고 보면 조금씩 어긋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그저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온전히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장르가 뒤섞인 글로 만들어졌던 것 같아. 글이 가져다주는 뉘앙스가 너에게 다르게 가 닿기를 바라며……



나의 모든 ‘너’.

‘너’는 영화와 건축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울 메이트 그녀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서로 다르지만 같이 걸어온 삶의 증인과도 같은 그녀이기도 하고, 일상의 시시콜콜함을 주고받는 존재만으로 따뜻한 그녀이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가는 그녀이기도 하고, 같은 공부를 하며 고민을 주고받던 유학 시절의 그녀이기도 하고, 빛나는 어느 한 시기를 같이 보낸 그들이기도 하고, 답사를 다니며 건축에 대한 공감대를 나눴던 그이기도 하고, 팀워크를 다지며 일과 일상을 공유하던 그들이기도 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글을 통해 서로 공감을 주고받던 그들이기도 하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기도 하다는 거. 그리고 그 모든 글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거.



조금 서두가 길었지만, 짧은 안부를

나는 요즘 마음의 평온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가 영화 속에서 아녜스 바르다가 마음에 풍경이 있다면 자기 안엔 바다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던 게 기억나. 나는 지금 검푸른 새벽 5시에서 햇빛이 가득한 오후 2시로 마음의 풍경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니 내 마음의 풍경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어딘가를 찾아 유영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더 밝고 따뜻해진 듯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가장 큰 이슈는 일과 일상, 둘 사이의 균형이었지. 한동안은 구분하려 노력했지만, 관점이 달라져서인지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일까? 요즘 건축이 좀 더 가깝고 편한 존재가 됐거든. 늘 건축에 진심이지만 어린 시절의 내게 건축은 창작의 즐거움과 함께 새로운 레퍼런스를 더 많이 채우려 조급하고 그래서 무겁고 멀리 있는 존재이기도 했거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채워지는 건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더라.

개인적인 성향은 본질을 추구하지만 트렌드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실무의 작업 그 사이에서 힘들기도 했지. 나는 트렌드를 쫓는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다가 힘듦의 레퍼토리를 곰곰이 생각해 봤지. 그런데 내가 힘듦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거더라.

생각을 바꾸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집중하기 시작했지. 곧 힘듦은 세력을 잃고 변두리로 밀려났어. 힘들 땐 그걸 잊을 만큼 대체할 만한 이슈를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좀 더 나를 표현하고 싶었지. 이제껏 꺼내보지 않은 뭔가를 찾아내고 싶었어. 아직 현재 진행 중인 따끈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나씩 꺼내 너에게 보낼까 해.



Un Espresso et Un Croissant

에스프레소 한잔과 크라상 하나

나의 일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글이 되어 마치 하나의 세계가 통째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글 속에 담긴 문장들을 오븐에 굽고 커피 머신에 내려본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남게 될지 궁금했거든.

겹겹이 층을 이루는 크라상과 크레마가 알맞은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좋겠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인 동시에 겹겹이 숨어있는 ‘무엇’이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아.


글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어쩌면 이렇게 ‘나’ 같은 글일까 생각하게 되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에 대한 생각과 건축가로서의 시선들이 글이 되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게 돼.

하지만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생각들은 그곳에 만들어 놓은 길 대로 통과해 나아가지 않고, ‘너’의 시선으로 읽히고 번역되어 또 다른 풍경으로 너에게 도착하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다른 의미로 통한다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인 것 같아.


내가 만난 세계의 조각들을
봉투에 넣어 보낼 테니
원하는 대로 너의 세계를 통해
이 탐험의 세계를
재해석하길 바랄게.


생각과 마음을 담아.  _ 귀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