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세계
어떤 생각들은 계속 살아남아 있지만,
어떤 생각들은 변질되거나 사라진다.
망각되지 않고 남겨진 것들,
때가 되기를 기다리며 익어가고 있는 것들,
저절로 내 안에서 분해되는 것들.
그리고 빈자리에 채워질 태어날 것들.
세상의 모든 탄생과 죽음처럼
내 안의 세계도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고 머물고 태어나고를 반복해 간다.
그 세계를 나는 탐험한다.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왜 나는 입을 때지 못하고 침묵했을까? 침묵의 그 고요함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해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들이 못내 아쉽다. 예전처럼 너에게 하듯이 생각을 툭툭 던질 수 있었더라면 좀 더 일상이 빛으로 가득했을까? 아니, 결과론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제물 삼아 지금 내가 얻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들이야말로 모래가 바람에 흩어져버리듯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제 때가 된 거다. 은둔을 내려놓고 일렁임을 즐길 차례다. 생각하기에 따라 일상의 풍경이 때로는 너무 지루하다가도 또 어느 땐 너무나 풍요로워지기도 하니까. 내 안에 일어나는 세계를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너’는 이곳에 없으니 그것들을 종이 위에 끄적여보는 것도 좋겠지. 언젠가 이 흔적들을 발견한다면 우리 사이에 뒤늦은 공감이 이루어질지도 모르잖아.
11월의 어느 새벽,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지. 깊숙이 쌓여가는 생각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기 전에.
생각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
네가 있는 곳까지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모든 ‘너’,
‘너’는 영화와 건축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울 메이트 그녀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서로 다르지만 같이 걸어온 삶의 증인과도 같은 그녀이기도 하고, 일상의 시시콜콜함을 주고받는 존재만으로 따뜻한 그녀이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만들어가는 그녀이기도 하고, 같은 공부를 하며 고민을 주고받던 유학 시절의 그녀이기도 하고, 빛나는 어느 한 시기를 같이 보낸 그들이기도 하고, 답사를 다니며 건축에 대한 공감대를 나눴던 그이기도 하고, 팀워크를 다지며 일과 일상을 공유하던 그들이기도 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글을 통해 서로 공감을 주고받던 그들이기도 하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기도 하다는 거. 그리고 그 모든 글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거.
며칠 전 토베 얀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너의 얼굴이 떠올랐어. 내 앞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너’를. 밤새 와인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고 있는 ‘너’를. 입 안에서 이야기를 계속 굴리다가 펜을 들었지.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이 작업하던 그림이 클로즈업되고, 어떤 그림을 그리냐고 묻는 친구에게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대중적인 작업에서 작가로서의 작업으로 나아가는 터닝 포인트 같았어. 전기 영화는 보통 성공의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지만, 생각해 보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주인공의 삶은 계속 이어지잖아. 실제 삶처럼. 세상의 모든 시작엔 과정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 뒤에 또 다른 이야기가 흘러가지. 그 이야기들이 생략된 시작과 결과는 어쩌면 무의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영화를 보고 너와 나, 우리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더라. 오랜만에 너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몇 가지 안부에 가까운 말들로 대화가 이어지다가 끝나면 뭔가 늘 허전하곤 했지. 과정이 빠진 이야기는 장마 끝 과일의 싱거운 맛처럼 허전했어. 왠지 소금이라도 쳐야 할 것처럼. 애써 꾸민다고 해서 예전의 충만한 대화가 이어질리는 없겠지. 늘 우리 사이에 과정이 빠진 이야기들이 헛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답했어. 그런 매일이 지속되다 보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어 그 모든 이야기들이 갈 곳을 잃고 표류 중이었지. 지금 이 순간 전하지 못하는 생각과 마음이 아쉽고 그리웠어. 서로 공감하며 보냈던 수많은 밤과 새벽과 아침과 오후의 시간들 속에 남겨진 우리가 한 때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지. 서로 공감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해도 그때의 우리는 그곳에 둔 채로 각자 뒤돌아서 다음을 향해 걸어 나왔으니까. 그리고 삶의 바운더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이야기한들 잘 와닿지 않았지. 그 관심에 대한 모든 히스토리를 시간 순서대로 읊어대며 설명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그 갭을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기에 삶은 참 복합적이니까.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글로 꺼내놓기 시작했더니 표현의 갈증이 뒤늦게 실감 나더라. 그래서 나의 모든 ‘너’에게 편지를 쓰려는 거야. 그 시절의 ‘너’는 이곳에 없으니 종이 위에 다시 소환해 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펼쳐보려는 거지. 여행을 하며 즉흥적으로 보내는 엽서처럼 답장을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니라 그저 언젠가 편지가 너에게 닿는다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영화에 가끔 그런 장면 있잖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한 시간을 머금은 빛바랜 편지 같은 그런.
때로는 말하듯이 편지로, 때로는 독백처럼 일기로, 때로는 진지하게 에세이로. 편지는 너와 나 사이를 좁히고, 일기는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고, 에세이는 생각의 깊이를 더하지. ‘너’와 ‘나’와의 대화뿐 아니라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대화이기도 했어. 오늘과 어제의 생각이 다르고, 머무는 장소가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지. 한 번에 적어 내려가는 글이 아닌 며칠이고 조금씩 끄적이는 글들을 모아 서로 어긋나고 상충되는 생각들을 너와 이야기하듯이 때론 한 밤 중의 일기처럼 이어나갔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하는 말처럼 시점이 어긋난 독백이 이어졌지. 어쩌면 이전의 나에 대한 후렴구 같은 것인지도… 대체로 비슷한 듯 후렴구처럼 반복되지만 길게 두고 보면 조금씩 어긋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그저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온전히 너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장르가 뒤섞인 글로 만들어졌던 것 같아. 글이 가져다주는 뉘앙스가 너에게 다르게 가 닿기를 바라며……
그동안 많이 달라졌겠지. 우리 모두. 우리 사이를 좁혀보자면 서로의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먼저 나의 ‘지금’을 표현해 보자면 이런 느낌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 언젠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에서 ‘마음에 풍경이 있다면 자기 안엔 바다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었던 게 기억나. 내 마음의 풍경은 어떨까 생각해 봤지. 나는 지금 검푸른 새벽 5시에서 햇빛이 가득한 오후 2시로 마음의 풍경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 내 마음의 풍경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어딘가를 찾아 유영하고 있지만 그래도 좀 더 밝고 따뜻해진 듯해.
우리 사이의 거리가 벌아지기 시작했을 때가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했을 때였지.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어딘가 넋이 빠진 사람 같았어. 스스로도 눈빛이 탁해 보였지. 시간이 지나며 일과 일상의 균형을 이뤄나갔고, 그렇게 한동안 ‘균형 잡기’는 내게 가장 큰 이슈가 되었지. 그러다가 요즘은 관점이 조금 달라져서인지 그 경계가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일까? 건축이 좀 더 가깝고 편한 존재가 된 게 아닐까 싶어. 늘 건축에 진심이지만 20대의 내게 건축은 창작의 즐거움도 컸지만, 새로운 레퍼런스를 더 많이 채우려 조급하고 그래서 무겁고 멀리 있는 존재이기도 했거든.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급하게 채워지는 건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더라.
또 다른 고민도 있었지. 개인적인 성향은 본질을 추구하지만 트렌드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실무의 작업 사이에서 중심을 잃곤 했어. 나는 트렌드를 쫓는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 날 문득 힘듦의 레퍼토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내가 힘듦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거라는 깨달음이 찾아왔지. 관점을 바꾸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집중하기 시작했어. 곧 힘듦은 세력을 잃고 변두리로 밀려났지. 대체할 만한 이슈를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좀 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어. 이제껏 꺼내보지 않은 뭔가를 찾아내고 싶었어.
아직 현재 진행 중인 내 이야기를 꺼내 너에게 보내려고 해. 내 일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동안 마치 하나의 세계가 통째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 글 속에 담긴 문장들을 오븐에 굽고 커피 머신에 내려본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상상해 봤지. 이 길의 끝에 무엇이 남게 될지 궁금했거든. 바라건대, 겹겹이 층을 이루는 크라상과 크레마가 알맞은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좋겠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인 동시에 겹겹이 숨어있는 ‘무엇’이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아.
글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울이라는 말. 어쩌면 이렇게 ‘나’ 같은 글일까 생각하게 되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에 대한 생각과 건축가로서의 시선들이 글이 되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게 돼.
그런데 어쩌면 문장 사이에 숨어있는 생각들이 그곳에 만들어 놓은 길 대로 통과해 나아가지 않고, ‘너’의 시선으로 읽히고 번역되어 또 다른 풍경으로 도착할지도 모르겠어. 그것대로 멋진 일인 것 같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다른 의미로 통한다는 것.
그럼, 너에게
내가 만난 세계의 조각들을
봉투에 넣어 보낼게.
원하는 대로 너의 세계를 통해
이 탐험의 세계를 즐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