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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Dec 01. 2021

기억하는 냄새들

다섯 번째 세계


길을 걷다 어떤 냄새와 마주친 순간, 문득 네 생각이 났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시절과 너’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향수를 쓰는 사람이 셀 수없이 많을 텐데 내게 그 냄새는 늘 너를 향해 있지.
후각은 과거의 어느 때로부터 기억들을 싣고 현재로 달려오는 메신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갑작스럽게 훅 밀고 들어오는 서프라이즈 같은.
일부러 생각해내려 하지 않아도 냄새들을 타고 찾아오는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떠올려봤어. 늘 그런 작은 순간들은 커다란 사건들에 가려져 중요함을 양보해야 할 것처럼 다루어지잖아. 난 그게 늘 ‘이건 좀 아니지’라고 스스로에게 따져 묻곤 하거든. 오히려 그런 순간 마음이 크게 요동치곤 하잖아.



2021년 11월

크루아상과 작업

크루아상의 버터향이 소환한 기억… _ BGM # Doesn't Matter | BENEE


건축학교 졸업 작품 준비를 하던 때로 시간을 되돌려 본다.

어느 새벽, 파리 12구, 6층 아니 실제론 7층, 작은 스튜디오에 나는 있다.

새로 내린 커피의 온기가 거의 식어갈 무렵, 문득 커피를 발견하고는 키보드 위의 손을 풀고 커피를 홀짝인다.

벌써 몇 잔 째 마시는 커피인지.

무감각해진 혀 끝과 몽롱한 머리는 늪에 빠져있다.

아무도 날 구해줄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선택한 졸업 작품 주제인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이 긴긴 새벽의 작업 릴레이가 끝나기는 하는 걸까 답답해 의욕이 꺾이기 직전의 직전이다.

후우우우.

잠시 창가로 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깜깜한 하늘과 별을 바라본다. 봄의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 쾌쾌한 공기를 희석시킨다.

흠흠.

그때 바람에 실려온 냄새.

머리가 순간 깨어난다.

집 바로 옆, 블랑주리에서 빵 굽는 냄새가 중정을 타고 흘러 들어와 작은 창 틈새를 밀고 방의 공기를 빵 냄새로 가득 채운다. 몽롱했던 머리와 정체 상태의 배가 동시에 활성화가 되어 빵을 먹을 준비가 된다.


빵을 사야 한다.

몇 시에 열었더라?

최고로 맛있는 커피와 함께 먹어야지.


머리와 몸은 빵에 온전히 집중하며 오픈 시간을 기다린다.


달칵… 다다닥.

크루아상 하나, 바게트 반 개 주세요.

다다닥… 달칵.


휘이이이 주전자의 물이 신호를 보낸다.

커피를 내리고, 잼과 버터를 꺼내 갑작스럽게 이른 아침을 준비한다.

모든 것은 20분 만에 완료.

갓 구워 낸 크루아상을 집어 들고 쭉 찢어 베어 문다.

아… 이 버터의 오일리하고 짭조름한 맛.

켜켜이 쌓아 올린 버터 층들이 오븐 안에서 부풀어 오르며 버터 향과 공기 층을 남긴다.

고작 이게 다라고? 묻는다면, 만든 사람의 정성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마디 해야겠다.

크루아상의 정체는 맛에 비해 정말 심플하다!

입 안에 맛과 향이 사라지기 전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밸런스가 딱 맞춰진다.

커피의 드라이하고 스모키하고 깔끔한 맛이 입 안을 기분 좋게 정리하며 다시 입 안으로 크루아상을 집어넣을 준비를 한다.

그렇게 이어진 릴레이로 접시엔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고 공기 중에 버터 냄새만이 방 안을 부유한다.

잊고 있던 작업이 접시 너머로 물음표를 던지며 남아있지만, 어쩐지 다시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크루아상이 잠시 다녀간 이른 아침의 스튜디오는 작업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기척으로 가득하다.

창 밖으로 아침이 오고 있다.



생선 수프와 매운탕

해안 절벽을 걷다가 숙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코를 자극하는 강한 냄새가 걸음을 멈춰 세운다.

어딘가 몸과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들 정도의 진한 냄새.

냄새란 명확한 경계가 없을 것이 분명한데 한 걸음 차이로 갑자기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흘러나온다.

아니, 내 후각이 작동하는 범위와 냄새의 범위가 만나는 접점, 경계일 것이다.

아, 뭐였더라.

언젠가 먹어본, 맡아본 음식 냄새다.

아니, 조금 다른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가 이곳에서 날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도 재료의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 낸,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라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린 시절과 똑같은 조건이 아님에도 몇 가지 공통점과 조합만으로 맛과 냄새와 기억까지도 소환해 내다니 사람의 감각과 지각의 조화에 놀라울 따름이다.

문득 배에서 엄청난 신호를 보내온다.

꼬르르륵……꼬르륵……

그 정체를 알기 위해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메뉴 판을 보기도 전에 옆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에 고개를 돌려보니 생선 수프 한 그릇이 놓여있다.

바로 저거다.

부야베스.

주문을 하고 냄새의 닮음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

분명 어린 시절 프랑스식 생선 수프를 먹어본 일이 없다.

하지만 몇몇 생선 요리들이 머릿속에 스치며 그것들을 조금씩 조합하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은 거다.

바다에서 먼 내륙에서 보낸 유년 시절. 바다 근처에서 나고 자란 엄마의 영향 때문인지 고기보다 생선을 즐겨 먹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입맛은 아직도 바다나 강에 가깝다.

주말이면 가까운 냇가로 나가 텐트를 치고 수영을 하며 놀다가 낚시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요리해 먹곤 했다. 거기에 토마토와 치즈만 들어가면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하얀 그릇에 가득 담긴 부야베스 위로 김이 모락모락.

한 입 가득 넣고 목으로 넘기는 순간 울컥 가슴에서 뜨거움이 올라온다.

매운탕과 부야베스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 깊은 맛과 냄새에 쌓여있던 그리움과 슬픔을 녹여낸다.



냄새는 어디로 가는가

숲에 들어서자 달콤한 5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밀려온다. 아카시아 나무 군락 전체에 하얀 꽃송이들이 팝콘 뿌려진 것처럼 점점이 박혀 바람에 흔들거린다.

아카시아가 피는 계절의 이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이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온다.

어딘가 들떠있는 달달한 공기.

집에서 먹어도 되는 음식을 굳이 밖으로 가지고 나가 피크닉을 하려 하고, 밖으로 나가 걷고 싶은 충동에 집 안에 있을 때조차 서성이게 된다. 거기에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두근거림은 고스란히 아카시아 향기에 해를 거듭하며 겹겹이 저장된다.

바람을 타고 꽃 향기가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져간다. 정말 사라진 다기보다는 더 이상 결합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흩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꽃, 나무, 흙, 물과 같은 자연의 냄새와 사람이 만들어 낸 음식, 불, 하수구, 매연과 같은 냄새들이 공기 속에서 아주 아주 옅게 희석되어 서로의 구분도 없이 세상 속을 여기저기 유영하며 떠도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각기 다른 조각난 것들이 모여 새로운 하나로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어쩌면 지금 이 초겨울의 공기 속에도 아카시아의 향기가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위로가 되는 생각이다.

그 사라지지 않음에.



P.S.
집 안 곳곳에 겨울이 연상되는 냄새들로 가득해. 귤, 고구마, 감, 생강차. 잘 숙성되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냄새들. 밖에서 막 들어온 차가운 공기 냄새와 함께 섞여있어. 이 조화로움. 저절로 ‘아, 이제 겨울이네.’ 몇 번씩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게 돼. 다른 계절에 비해 겨울을 받아들이는 일이 내게는 좀 더 힘이 필요한 걸 지도 모르겠어. 겨울에 익숙해지기 위해 감각을 끌어올릴 시간.
어느새 소파에서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가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 온돌 바닥에 대한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자동으로 따뜻한 온돌 바닥으로 내려가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집에서의 시점이 낮아지게 되지. 그리고는 곧 귤을 떠올리게 돼. 따뜻한 바닥에 앉아 뒹굴뒹굴 거리며 귤을 만지작만지작. 그러다 껍질을 손톱으로 톡 벗기는 순간 손끝에 귤껍질의 과즙이 팡 터지지. 방안 가득 귤 냄새가 퍼지고, 한 조각 떼어 입 안에 넣으면 건조했던 입안과 목이 상큼해져 그때부턴 손을 멈출 수가 없게 되지. 생각해 보면 겨울 간식들은 모두 온돌 바닥에서의 시시콜콜한 기억들과 이어져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어딘가에서 군고구마나 귤 냄새가 나면 ‘아, 겨울이구나.’ ‘따뜻한 바닥에 눕고 싶다’ 같은 생각들이 저절로 튀어나오곤 하는 것 같아. 해마다 똑같이 반복되는데도 늘 그 냄새에 그리움이 쌓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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