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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Jan 17. 2022

무빙워크 위를 걷다

그 시간들…


여섯 번째 세계,

“나는 내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맘 편히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딸기를 따러 다니는 어린아이였다가 장작을 톱질하는 청년이 되기도 했고 페를레를 야윈 무릎 위에 앉혀놓고 벤치에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는 아주 늙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책을 읽다가 ‘아, 나는 이런 걸 꿈꿨었나 봐’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기억이 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이런 모습을 계속 찾고 있었어.
우리는 늘 뭐가 되고 싶다, 갖고 싶다 말하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위가 있다는 것을, 머릿속 잡다한 여러 문장들이 이 글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듯했어.

누구나 갖고 있는 꿈같은 모습, 이르고 싶은 그 풍경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지.
여러 모습들을 상상해 봤어.
특별히 뭔가를 성취하거나 하지 않아도 어떤 모습이든 그 장소에 녹아들어 자연스러웠으면 좋겠어.
처음엔 좀 어색하기도 하고 낯설어도 몸에 익어가겠지. 모든 것엔 처음이 있기 마련이니까.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그런 생각들을 적어 나갔지.



2022년 1월

우리는 길 위를 걸어 나갔고, 그 만큼의 시간이 흘러갔지. _ BGM # Loom  | Olafur Arnalds & Bonobo


무빙워크 위를 걷다

지금 막 2022년, 새로운 문을 열고 지나왔다.

타임머신이 없는 한 다시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마치 무빙워크에 탄 것과 같다. 그냥 제자리에 서 있어도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긴 무빙워크.

이미지를 상상해 보자.

2022년이라는 무빙워크에 올라탄 한 사람.

가만히 서 있기 뭐 하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튼 채 조금 리듬을 타 보자. 남들은 이 이미지를 볼 수 없으니 신경은 쓰지 말길.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상상 속 이미지니까.

리듬 타는 게 익숙해졌다면 작년에 미쳐 버리지 못한 생각들을 무빙워크 바깥으로 던져 버리는 거다. 괜찮다. 무단 투기는 걱정 말기를.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냉장고처럼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장 깊은 곳까지 손을 넣어 ‘오래된 것’들을 끄집어내 가차 없이 좌우로 던져버리길. 좀 더 마니악하다면 매직블록에 물을 묻혀 모든 흔적들을 밖으로 밀어낸다.

이제 좀 시원해진다.

그다음, 가장 중요한 하나.

올해의 나를 어떻게 규정해 볼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특별히 무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여행자? 도전자? 방랑자? 히치하이커? 일상 생활자? 나 홀로 요리사? 미니멀리스트?

무엇이 됐든 하나 또는 둘 정도로 목표를 정하는 것이 혼돈을 줄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원하는 대로.

구체적인 위시 리스트에 앞서 방향성을 만들어보면 뭔가를 선택할 때 기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때론 그 기준에 맞지 않아 뭔가를 내주고 얻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리 정한 올해의 방향성을 한번 생각하다 보면 그런 선택이 복잡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마음대로 골라잡고 1년이라는 시간을 그에 맞게 살아보기로 해본다.


이제 다시 무빙워크 위로 돌아와 이 자체를 즐겨보는 거다.

가만히 서서 저절로 앞으로 갈 수도 있지만 조금 걸어 볼 수도 있겠다. 무빙워크의 속도는 생각보다 느려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미미해 실제 걷는 것으로 리듬을 줄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됐든 건조한 일상에 리듬은 중요한 듯하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인데도 그 안에서 에너지를 얻게 되니 참 신기한 일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적인 순간들을 하나의 풍경사진 찍듯이 찍어보는 것도 좋겠다. 스쳐 지나는 풍경에 의미를 두면 그건 곧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되어 남게 된다. 사유는 풍경 속에 그렇게 자리를 잡고 퍼져나간다. 단지 사진 찍는 행위에 매몰되면 남는 건 무거운 하드용량의 압박뿐이다. 그러니 풍경과 만나는 순간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대신 관조하는 자세로 사물, 사람들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르다. 그건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닮아있다. 아이처럼 깔깔깔 웃고, 감정 이입해 눈물도 흘리고, 괜히 폴짝폴짝 뛰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무거웠던 일들이 별것 아니게 되고, 일상이 좀 더 반짝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아,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 옆 무빙워크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힘 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다. 이때부턴 귀를 닫자. 안 들어도 왠지 알 것 같으니까. 살면서 매일 똑같은 얘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식상한 얘기도 가끔은 창의성이 들어가면 좋으련만… 안타깝구나. 연민의 감정까지 도달하니 이젠 밉지도 않구나. 그래. 이런 식으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거지. 개그와 유머, 연민, 풍자가 뒤섞인 태도로 삶을 긍정할 수밖에. 다른 대안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게 힘든 날도 있다. 몸이 축축 처지고 머리 회전도 느린 날. 잘 따져보면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건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쉬고 나면 대부분 좀 더 나아진다. 그러니 이런 날 하루는 저절로 가는 무빙워크에 몸을 기대어도 되지 않나! 무임승차가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 같은 것이니까. ‘아, 오늘 하루 망했어’라고 자책하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당연한 법칙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실제 무빙워크와 다르게 우리는 미래라는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뒤돌아 걷거나 뒷걸음질한다면 뒤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언제고 그렇게 뒤를 향해 계속 걸을 수는 없다.

게다가 유보하거나 재촉해도 같은 지점, 같은 시간에 도착 예정이니까. 2022년 12월 31일이라는 마지막에.

수많은 길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길. 너무 우리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일초, 일분,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을 품고 있는 무빙워크 같은 이 길을 부담감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걷는 거다. 그러면 보이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작지만 큰 것들, 놓치고 있지만 몰랐던 것들을.


내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자면, 1년 동안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히치하이커의 자세로 재미있는 탐험을 하며 일과 일상의 바운더리를 확장해나가고 싶다. 또 다른 하나는 어딘가에 깊게 빠져들어 끝까지 파헤치는 탐정이 되고 싶다. 정말 끝까지란 얼마나 일까 진짜 궁금하다. 이 두 가지 관점이 분명 작년 그리고 그 이전과 다르다는 것. 그래서 출발점이 다르다.

이렇게 나는 한 해의 처음인 1로부터 시작해 무빙워크의 365 중 17을 지나고 있다.

말과 글의 힘은 내뱉는 순간, 쓰이는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며 작은 파동이 시작된다. 변화의 그라데이션이 번져나간다.




지붕 위에 걸터앉다

지붕마루에 걸터앉아 도시의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물론 상상 속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조금 아찔하지만 이곳은 도시의 다양한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한옥 지붕의 마루 위다. 건물 옥상이어도 상관없다. 어디든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면. 이질적이면서 어딘가 닮기도 한 복잡한 도시의 풍경들을 휘이익 둘러본다.

언젠가 새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얼굴 측면에 눈이 있어 정면을 인식하기가 어려워 고속도로 투명 방음벽이나 건물 유리에 부딪혀 죽는 새들이 의외로 많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들의 시야는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얼굴의 정면으로 향해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이 인식되지 않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사람의 시야가 지금보다 넓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도 궁금해진다. 이쪽과 저쪽이 한꺼번에, 넓게 보일 텐데. 그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풍경이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쪽과 저쪽을 한 번에 바라보기 어려운 모호함이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 속에 같음 또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늘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 모호함 속에서 여기이기도 저기이기도 하고,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Double je’로서 올 한 해도 살아볼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지붕마루의 꼭대기에 서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원의 궤적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이쪽과 저쪽 그리고 모든 풍경이 하나로 이어진다. 이번엔 좀 속도를 높여 몇 바퀴 연속으로 돌아본다. 하나로 이어진 풍경이 계속 반복되어 이제 눈을 감고도 이 풍경이 이어질 것 같다. 돌고 돌고 도는 풍경 속에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느끼며 풍경 중심에 나는 균형을 잡으며 서 있다.




P.S.
벌써 새로운 해가 시작된 지 2주.
마음속으로 일 년의 시나리오를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며 좀 산만하게 보냈지. 그래도 하나의 방향을 잡았으니 디테일은 생각날 때마다 채우면 될 테고.
저절로 가는 무빙워크 위에서 어깨에 힘을 뺀 채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따로 또 같이 걸어보는 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보며 너의 시작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우리에게 펼쳐진 이 1년이라는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익사이팅하기를 바랄게.

나의 모든 너, 당신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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