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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혹은 경계의 예술

여섯 번째 조각

by 귀리

집과 시간


집과의 이별을 앞두고, 나는 나만의 의식을 치른다.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꺼낸다.
손끝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벽에 손을 얹어 집의 온기를 느낀다.

벽지 위에 남겨진 흔적, 낡은 종이 냄새, 천장에 스민 빗자국, 헐거워진 문틀.
그 모든 풍경이 마치 내 삶의 일부가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익숙하지만, 이제 떠나야 할 순간임을 조용히 속삭인다.

그 감각 속에서 나는 깨닫는다.

이사는 단순히 공간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새로 짜 맞추는 일임을.
기억과 정체성을 다시 배열하며, 살아온 흔적과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마주하는 일임을.


지나온 이사들을 떠올린다. 혼자일 때도, 함께였을 때도 있었고, 먼 나라의 낯선 도시로 향하기도 했다.
가장 오래 머문 도시, 서울을 떠난다는 생각조차 여전히 낯설다.
열여섯 번의 이사를 했지만, 그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이사를 준비하는 한 달 동안, 집과 집 사이의 중간에 서 있는 듯한 묘한 공기에 잠긴다.

많은 것을 버리고 비운다. 망설이며 붙잡던 것들을 떠나보내고, 앞으로 함께할 물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일상과 삶이 한 번 정리된다. 이사는 그 과정을 평소보다 빠르게 밀어붙인다.
가구와 물건에 스민 기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작은 작별 의식을 치른다.
집 안에 쌓인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어 시간 여행을 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저장한다.


살던 집을 떠나 새 집으로 옮기는 일은 단순한 짐의 이동이 아니다.
기억을 접고, 흔적을 정리하며, 시간을 상자 속에 담는 일이다.
마음과 존재, 삶의 한 조각을 옮기는 행위이자, 경계를 새로 그리는 시간이다.

혼돈의 순간에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서부터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집의 일부일까.
손끝에 스민 지난날의 흔적 속에서 공간과 시간, 기억과 존재가 뒤엉킨다.

마지막 순간, 나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텅 빈 공간에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친다.
‘이사’라는 의식.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 들뜬 과정이 서서히 끝나간다.


찰칵, 열쇠를 돌린다.
문을 닫는다.
그 순간, 어느 한 시절이 고요히 끝난다.


그리고 또 다른 문 앞에 선다.
새 집의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밀어 넣는다.
낯선 공기의 냄새, 아직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벽, 텅 빈 공간에 울리는 첫 발자국 소리.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지나, 새로운 시간 속으로 들어선다.



새로운 숨


새 집에 들기 전, 나는 ‘베이킹 아웃’을 했다.
난방을 가장 뜨겁게 틀어 올려, 집 안 가득 고여 있던 불쾌한 기운과 묵은 냄새를 밀어낸다.
그 순간은 마치 새 숨을 불어넣는 의식 같다.

그 순간, 무라노 섬에서 보았던 유리 공예가 떠올랐다.
말랑해진 유리에 장인이 숨을 불어넣듯, 집은 점차 북한산에서 흘러내려온 신선한 공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집은 새 것의 껍질을 조금씩 벗겨냈다.


낯선 집, 낯선 방.
회전의자에 앉아 천천히 빙글 돌며 시선을 흩뿌린다.
텅 빈 공간, 미세한 정적. 허전함을 달래듯 라디오를 켠다.

먼 곳에서 도착한 쇼팽과 재즈, 보사노바.
소리의 입자들이 벽을 스치고, 바닥을 적시며, 여백을 하나둘 채운다.
집은 음악을 삼키며 조금씩 나의 호흡과 겹쳐진다.

시작은 완벽을 원하지 않는다.
초고처럼, 초벌처럼.
비워진 자리에 가구와 살림살이가 들어오지만, 여전히 많은 여백을 남긴다.

집에 안착했다는 감각.
그건 단번에 닿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덧칠하듯 갱신되며 이어진다.



전환의 방


조각난 생각들. 글, 고민, 웃음, 슬픔, 그리고 기쁨.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의 방 안으로 모여든다.

중심을 가진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방은 단순히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이 아니라, 흩어진 것들을 붙잡아 모아주는 자석이자, 내면의 파편을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남길 것을 남기며, 새로 만들 것을 천천히 빚어낸다.
정리의 과정은 삶의 선택과 닮아 있다.

비움은 채움을 가능하게 하고, 떠남은 다시 시작을 부른다.

공간이 달라지면 작업 또한 섬세하게 바뀐다.

빛이 달라지면 호흡도 달라지고, 공기의 울림에 따라 사유의 결도 바뀐다.

나는 예감한다. 이 작은 변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과의 간극을 드러내고, 내 일상과 작업의 방향을 조금씩 틀어놓으리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일상에 변화를 불러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한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은 그 어려운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삶의 궤도를 살짝 비껴가듯, 다른 각도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작업은 그 틈에서 낯선 언어를 발견하고, 나는 그 언어를 통해 다시 나 자신에게 도착한다.



몸의 자리


이사는 가구를 다시 생각하기에 좋은 순간이다.
삼청동에서의 지난 삶은 오래된 정서를 붙잡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편리함을 전제로 한 새 집에 오면서, 나는 의자 두 개를 새로 들였다.

책상에 어울리지 않던 낡은 의자는 식탁 곁으로 보내 제자리를 찾아주고, 회전과 높낮이 조절, 유연한 등받이를 갖춘 새 책상용 의자를 마련했다.

의자는 다른 가구와 달리 몸과 가장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서 있거나 걷는 일은 온전히 몸의 몫이지만, 앉는 행위는 의자라는 매개를 통해 중심을 찾는다.


책상 앞에 앉아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린다. 걷기가 생각을 흘려보내듯, 회전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걸까.
돌 때마다 공간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때마다 생각의 여백이 열리며 새로운 중심이 만들어진다.
의자는 고정된 물건이 아니라 늘 변주하는 작은 공간이고, 그 공간을 완성하는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다.
나는 이 의자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업의 시간을 이어갈 것이다.

밤이 되면 회전의자를 떠나 침대 곁 암체어에 몸을 기댄다. 등받이는 98도에서 135도 사이를 오가며, 다리를 올려놓는 스툴과 한 세트를 이룬다. 앉음과 누움의 경계 위, 어중간하지만 아늑한 자세.
이 의자에서 나는 수많은 낮과 밤, 새벽을 보내게 될 것이다. 책과 음악, 그리고 때로는 달콤한 잠과 함께.

문득, 두 개의 의자가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마치 내 분신처럼, 나와 함께 공간을 호흡하고, 나의 중심과 움직임을 반영하는 존재.
이사를 계기로 불편함을 당연시하던 습관을 바꾸었고, 그 변화는 내 몸을, 그리고 일상을 조용히 다른 궤도로 이끌고 있다.



흐르는 경계


삶의 터전을 옮기고도 한동안은 낯설음만이 남는다.
서울을 벗어나 지축에 닿았을 때, 그 변화는 머나먼 도시로 건너온 듯했다.

경계 위의 동네.
행정은 엇갈리고, 교통은 끊기고, 풍경은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틈새마다 공기처럼 스며드는 가능성이 있었다.
경계는 금이 간 벽이 아니라, 내가 새겨 넣을 수 있는 유연한 선이었다.

나는 걸었다.
조금만 발걸음을 옮겨도 경계는 허물어졌다.
낯선 골목은 어느새 익숙한 리듬을 품었고, 걸음을 반복할수록 바운더리는 부드럽게 확장되었다.

집을 중심으로 반경 2킬로미터, 왕복 한 시간의 원을 그리며 나는 동네라는 지도를 천천히 색칠해 갔다.
걷는 동안 세부는 사라지지만, 전체의 윤곽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안정과 탐험, 그 사이 흔들리는 마음 위에 오늘의 바운더리가 놓인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숨결, 매일 갱신되는 파동.
그 파동 속에서 일상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스며드는 리듬


‘이사’라는 의식은 집과의 작별과, 새 집에서의 적응 사이를 흐르며 이어졌다.
마침내 안착했다는 감각 속에서, 나는 옛 집을 마음속으로 떠나보낸다.
다섯 번의 계절을 함께한 기억을 뒤로 하고, 이곳에서 첫 계절이 시작된다.

익숙한 공간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지만,
그 페이지는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벽지를 뜯어내듯 흔적과 기억을 떼어낼 수는 없다.
남은 것들은 마음과 머릿속에,
때로는 이곳에 조금씩 스며들며 새로운 모양으로 자란다.

이 시간들을 기록하며, 나는 삶의 한 장을 넘긴다.
이사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
닫힌 문 너머로는 돌아갈 수 없고,
열린 문 앞에서만 새로운 시간이 숨을 쉰다.
처음엔 두려웠던 새 집에서의 뿌리내림도
조용히 익숙함으로 바뀌어간다.

삶은 계속된다.
문을 열고 닫으며, 외출하고 돌아오는 반복 속에서,
거대한 의식 같던 이사는 이제 일상의 리듬 속으로 스며든다.

창밖을 보니, 마을 축제가 한창이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마음이 들뜨고,
나는 문을 연다.
익숙한 냄새, 벽을 채운 축제 포스터, 광장 가득 울리는 웃음.
모든 소리와 빛이 나를 감싸고,
나는 천천히, 축제 속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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