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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풍경의 조각들을

첫 번째 조각

by 귀리


감각으로 설계된 집


검푸른 새벽과 아침 사이, 경계의 시간.

창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람에 귀 기울인다.
그 순간, 감각은 눈을 뜬다.


아직 완전히 그려지지 않은 마음속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유영하며 흔들린다.

도시의 숨결, 기억 속 장면,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이 겹쳐진다.

“마음에 풍경이 있다면, 그 안엔 바다가 있어요.”

영화 속 한 대사가 마음속을 스치며, 내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아침의 빛 속에서, 바람 속에서, 숲 속에서 작은 기적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 말처럼, 귀로는 빗방울의 리듬을 듣고, 코끝으로는 계절의 향을 맡는다.

햇살은 벽 위로 은은하게 번지고, 바람은 피부에 조용히 흔적을 남긴다.

발걸음이 남기는 미세한 울림,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 따뜻한 차 한 잔이 남기는 온기,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그 작은 기적은 일상의 틈틈이 조용히 피어난다.


나는 그 흔적 속에서 일상의 결을 더듬으며, 평범한 순간 속 숨어 있던 빛과 감각을 발견한다.

감각의 입자들은 안개처럼 스며들어 피부에 닿고, 시선의 스펙트럼은 무지개처럼 흩어져 새로운 세계를 연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겹겹이 쌓여 마음속에 작은 도시를 이루듯 풍경이 되고, 그 풍경은 다시 나를 감싸며 마음속을 유영한다.

그곳을 산책하듯 걷는 동안, 열두 개의 조각이 조용히 눈앞에 펼쳐진다.

식탁 위 음식, 집이라는 공간, 재료와 색의 결, 머무는 시선과 떠나는 이사,
일상과 작은 예술, 스며드는 순간과 기억, 일상의 리듬, 사이와 틈, 마지막을 의식하는 마감까지.


시작도, 끝도 모두 풍경이다.

나는 그 풍경들을 종이 위에 조심스럽게 새겨 넣는다.
이곳은 ‘사람과 풍경, 일상의 결’을 해석하는 작은 방,

당신과 내가 함께 만들어가는 감각의 집이다.


빛과 바람, 기억과 순간이 어우러져 호흡하는 공간.
감각의 입자가 천천히 내려앉아 정원이 되고,

마음속에 지어진 집은 안팎을 오가며 나를 새롭게 만든다.
나는 그곳에서 풍경을 새롭게 배우고,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시작하는 사람


얼마 전, 토베 얀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질문 하나가 화면 위에 떠올랐다.


“지금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잠시의 정적 뒤 돌아온 대답.
“시작하는 사람.”


단 한 문장이었지만, 내 안에서 잠든 불씨를 흔들어 깨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으로 나를 불러냈다.

나도 시작하고 싶었다. 말로 다 옮기지 못했던 감각을 글로 쓰고 싶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의 순간들.

귀 기울이고, 표현하고, 나누던 시간을 다시 불러내고 싶었다.


작은 불씨 하나.


'탁'하고 어둠 속에 번진다.
바람에 흔들리며 희미한 불꽃이 벽과 공기 사이로 춤춘다.

그 빛과 그림자 속에서 감각은 천천히 깨어나고,
나는 마침내, 다시 쓰기 시작한다.



감각으로 빚어진 풍경


문장들을 오븐에 굽는다면, 어떤 향이 날까.

커피 머신에 내려본다면, 어떤 맛이 입 안에 머무를까.


겹겹이 층을 이룬 크루아상 한 조각,

적당히 쓴맛을 머금은 에스프레소 한 잔.


겉은 단순해 보여도 속은 끝없이 이어지는 결로 채워진다.

글도 그렇다. 읽는 이의 시선에 따라 새롭게 번역되고, 전혀 다른 풍경으로 도착할 수 있다. 내가 보낸 감각의 조각들이 굳이 내가 걸었던 길을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세계가 된다면—그것만으로 충분히 멋진 일이다.


이 책은 감각과 기억의 결을 따라가는 작은 여행기다.

머릿속으로 펼쳐진 생각의 방을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벽마다 스며 있는 기억과 감각을 살펴보고, 지난 순간들의 잔향을 느낀다.

그 방을 지나 사유의 복도로 이어지면, 긴 통로 끝에서 비춰오는 빛과 그림자를 따라 내 안의 질문과 대답, 마주침과 떠남의 리듬을 탐험한다.

마침내 다다른 풍경이 머무는 작은 창 앞에 서면, 시간과 공간이 겹쳐진 풍경이 조용히 내려앉고, 내 마음과 기억 속에서 열두 개의 조각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느리게 그 조각들을 따라 여정을 이어간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수많은 얼굴을 떠올린다.

함께 밥을 먹던 따뜻한 그녀, 유학 시절 같은 고민을 나누던 친구, 건축 답사에서 풍경을 함께 이야기하던 동료, 일과 일상을 함께 설계해 온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모두 나의 ‘너’다.
결국 이 글은 그 모든 당신에게 건네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나 자신에게 보내는 대화다.


감각의 열두 조각 중, 그 첫 번째 조각.

아직 만나지 못한 감각 속 작은 불씨.

그 불씨는 누군가의 마음과 생각 끝에 은은한 불을 켜고,

지나간 기억을 불러내며, 오지 않은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풍경이 조용히 피어난다.


나는 감각의 집 안에서 숨을 고르며 기억과 순간을 품고,

마음의 리듬에 귀 기울이며 감각의 풍경 속을 걷는다.

그 길 끝에서, 작은 불씨는 은은한 불빛으로 번지고,

나와 당신의 세계를 조용히 밝힌다.

그 빛은 천천히, 당신 안에서도 스며들어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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