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조각
“진정한 여행은 크루아상을 먹는 입안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감각이 우리를 낯선 세계로 옮겨 놓는다.”
필리프 들레름,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음식은 일상을 건너는 감각의 기록이다. 오감이 머무는 곳, 기억이 깃드는 자리. 식탁은 매일을 통과하는 삶의 풍경이며, 추억을 되돌리고 낯선 세계로 이끄는 그릇이다.
일상의 감각을 맛있는 접시에 담아 함께 나누고, 함께 바라본다. 스쳐 간 기억과 오늘의 식탁, 그 위에 펼쳐진 풍경들을 바라본다.
식탁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음식과 기억, 일상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장소다. 기억은 음식의 온도, 질감, 냄새와 함께 머문다. 이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든다면, 함께한 사람들 모두가 공동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식탁의 풍경과 사람들이 스쳐 간다. 엄마가 차려준 열두 살 생일상, 소박하지만 즐거웠던 친구와의 크리스마스 저녁, 함께 요리하고 나눠 먹던 기숙사 주방, 까마득히 그리운 어린 시절의 밥상, 밤새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던 유학 시절의 접이식 테이블, 모니터 앞에 접시 하나 올려둔 나 홀로 밥상까지.
함께 나눈 마음들, 나누지 못한 감정들이 이 식탁들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하루 세 번, 식탁은 음식과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 나머지는 비어 있다. 그 비움은 다시 채움을 준비하는 여백이다. 그 곳에 음식과 사람, 그리고 일상이 머물다 간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것은 우리가 살아낸 하루하루의 조각이기도 하다.
이사 온 지 다섯달. 일상의 플랫폼을 바꾸는 일이 이렇게 큰 영향을 줄 줄 몰랐다. 매일 다른 모습의 북한산, 자연의 소리와 숲 냄새. 서울이 아닌 곳에 산다는 것. 지축, 아파트, 공동체... 모든 것이 새롭다. 서로 별개로 존재하던 것들이 낯선 조합으로 일상 속에 스며든다.
일상의 장소가 바뀌자 라이프스타일도 달라졌다. 탈서울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집 안 풍경도 달라졌다. 입주 전 아파트는 모델하우스처럼 똑같은 평면과 가구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집이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식탁의 풍경이다. 채식을 시작하며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사 온 후 비로소 뿌리를 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식재료와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음식을 담는 ‘식탁’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식탁이 집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집(house)이라는 공간에 일상이 채워지며 비로소 진짜 집(home)이 완성된다.
식탁은 집에서 가장 중심에 놓인 플랫폼이다. 빈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 한 끼가 완성되고, 비어 있는 그릇에 요리를 담으면 플레이팅이 완성된다. 집, 식탁, 그릇. 모두 처음엔 비어 있지만, 일상으로 채워져 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식탁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하루의 피로가 내려앉고, 대화와 웃음이 오가는 자리다. 밥을 먹는 행위는 생존을 넘어, 관계와 기억을 만드는 의식이다.
한 끼의 밥상이, 우리 삶의 풍경을 비춘다.
이사하면서 식탁 배치에 변화를 주었다. 이전에는 모든 요리와 식사가 아일랜드 식탁에서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공간마다 다른 경험을 한다. 각 자리마다 느껴지는 감성과 시선이 달라, 집 안 풍경도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는 듯하다.
ㄱ자 주방 맞은편에는 기존 바 테이블보다 두 배 긴 아일랜드 식탁을 들였다. 요리 준비와 커피를 내리기에 충분한 넓이. 한쪽 끝에는 대나무 채반 위에 가지, 토마토, 호박 등 채소들을 늘어놓았다. 오가며 언제 먹을지,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채소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순간, 작은 예술과 영감이 떠오른다.
북한산이 보이는 창가에는 원목식탁을 두어 마주 앉아 브런치나 저녁을 즐기게 했다. 밥을 먹다가 문득 산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식사에 집중하게 된다.
소파 앞 둥근 유리 테이블에서는 간단한 음식과 맥주, 와인, 커피와 빵을 즐긴다. 둥근 접시로 테이블을 채우면, 테이블 자체가 하나의 큰 접시처럼 느껴지고, 음식과 일상이 자연스레 섞인다.
식탁은 참 흥미로운 공간이다. 위치와 형태에 따라 식사의 분위기와 즐거움을 달리한다. 새 집에서의 식사 경험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식탁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식탁은 관계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주 등장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식탁 장면이 반복되며, 관계의 변화와 가족 분위기를 보여준다.
대화가 없는 식탁을 카메라가 멀리서 바라본다고 상상해보자. 달그락, 쩝쩝, TV 소리… 소리들이 무심히 반복되다가 누군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소리만 녹음해도 충분할 만큼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밥을 먹는 행위만이 식탁 위를 스친다. 그곳에서는 가족 간의 관계가 잠시 멈춰 있다.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시간은 대개 식사 시간이다. 오랜만의 모임에서도 빛나는 순간은 음식을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는 시간에서 나온다. 일상 속에서 식탁은 관계의 중심이 된다. 다이닝룸이 없더라도, 식탁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가구이자 공간인 식탁 위에서는 각자의 이야기와 서로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흐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식탁은 가족과 함께했던 좌식 테이블이다. 함께 먹던 국과 반찬, 간식, 생일상, 소풍날 김밥까지. 디테일은 흐릿해도, 음식과 가족의 모습은 선명하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음식의 기억은 몸속 깊이 ‘맛의 DNA’로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의 음식 이야기를 반복한다. 재현하려 해도 완벽할 수 없기에, 이야기로나마 음미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음식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고유한 맛을 가진다. 어린 시절 엄마의 음식, 자취 시작 후 언니가 해준 음식, 유학 시절의 퓨전 요리, 채식 이후의 음식까지. 맛의 기억은 입 안에서 다시 살아나며, 자연스럽게 그 시절 가까웠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음식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매듭이다.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하는 순간, 작은 공동체가 형성된다. 눈맞춤, 표정, 목소리를 통해 공감이 이루어진다. 식탁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이런 공유와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식탁의 형태, 조명, 크기, 비율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식탁 폭은 1미터 안팎이 적당하다.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인식하기에 충분하다. 둥근 테이블은 시선을 고르게 분산시키고, 곡선 구조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식탁 위 조명은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중심이 된다. 조명이 닿는 범위가 곧 식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인 요리를 마친 뒤 조명만 남겨두면, 마치 촛불을 켜놓은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 순간에는 평소 쉽게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에는 진신과 친근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함께 식사를 나누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때로는 ‘최후의 만찬’을 상상하며 코스를 구성하고, 요리 하나하나를 즐기며 페어링을 고민한다. 식탁의 레이아웃과 메뉴를 스케치하는 과정 자체가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함께 먹는 식사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공동체의 언어다.
감각을 자극하는 음식은 입맛을 돋운다. 먼저 색과 플레이팅을 보고, 향을 맡고, 식감을 느끼며 맛을 음미한다. 그리고 그 맛을 표현한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 다른 개인이지만, 비슷한 감각 속에서 공통된 경험을 나눈다.
와우... 판타스티코! 쎄봉! 굿! 딜리셔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나라와 언어가 달라도 감탄이 비슷하게 흘러 나온다. 표정과 제스처에 감정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입이 즐거워서만은 아니다. 무감각한 일상에 자극이 되는 즐거움이 식탁 위에서 이루어진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음식, 씹을수록 달라지는 맛, 머릿속을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까지. 식탁 위에서 우리는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갓 구운 바게트,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바나나 튀김, 모래처럼 부서지는 사브레 과자, 아사삭 소리 나는 부각, 겉과 속의 식감이 다른 송편... 채식을 시작한 뒤 그 감각이 더 섬세해졌다. 요리하기 전 채소를 손질하며 먼저 맛을 보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면 그 맛을 살릴 요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입 안에서 씹을 때 질감과 맛, 소리까지 감각하게 된다. 익숙한 재료도 날것으로 먹거나 조리법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다. 요리와 식사를 통해 감각을 작동시키는 순간, 식탁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예술과 즐거움의 장이 된다.
식탁은 오감을 자극하는 무대다. 눈은 색을, 코는 향을, 귀는 요리의 소리를 기억한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혀끝에서 퍼지는 맛까지, 모든 감각이 동시에 깨어난다. 음식은 다섯 감각을 깨우는 가장 일상적인 예술이다.
우리의 식탁 풍경은 멀리서 바라볼 때 낯설다. 일상은 다른 눈으로 보면 비일상이 된다. 평범한 식탁 위에 다른 식탁을 포개어 바라보면, 서로 다른 세계의 풍경을 느낀다.
여기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세팅되어 있다. 정갈하게 놓인 젓가락과 숟가락. 식탁의 중심에 뚝배기를 위한 자리를 비워두고, 그 주위로 반찬들이 하나씩 자리를 채운다. 겉절이가 서빙되며 반찬의 자리가 다시 조정된다.
보글보글, 하얀 김을 내뿜으며 된장찌개가 중심에 놓이면, 소리와 냄새, 시각적 에너지가 식탁 전체를 압도한다. 뚝배기의 기운이 한풀 꺾여야 음식 전체의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비로소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한 사람은 숟가락으로 찌개를 한 입 뜨고, 또 한 사람은 젓가락으로 겉절이를 집는다. 이것이 일상적인 한식 식탁의 풍경이다.
한식은 모든 음식을 동시에 올리고, 자연스러운 위계가 생긴다. 반면 양식은 코스별 서빙과 페어링을 강조한다. 같은 크기의 식탁에서도, 한식은 음식으로 가득 차고, 양식은 여백이 많다. 출발점과 방향이 다른 두 식탁, 그 차이는 곧 삶의 방식 차이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식탁의 풍경을 마주할 때, 우리는 새삼 ‘다름’을 인식한다. 식탁은 문화의 축소판이다. 같은 식탁이라도, 그 위를 채우는 방식에 따라 삶의 리듬이 달라진다.
어린 시절 익숙했던 엄마의 음식에서 시작된 나의 식습관은, 집을 떠나 다양한 식탁을 마주하며 변화를 맞이했다. 모든 집의 식탁 풍경과 음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여러 사람의 취향을 반영해야 했기에, 음식 선택권을 갖기 어려웠다. 독립 후 비로소 개인 맞춤형으로 변화했다.
채식을 시작한 이후, 온몸 구석구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식재료에 대한 인식, 요리 방식, 맛에 대한 기준까지 달라졌다.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과 담백한 양념이 ‘맛있다’ 고 느껴진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일지도 모른다. 먹는 것을 바꾸는 일은 곧 삶의 결을 새로 짜는 일이다.
뿌리 깊은 맛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후각과 미각에 새겨진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 쌓인 맛과 새로 자리 잡은 맛의 기준이 내 안에서 오묘하게 공존한다.
집은 고유한 냄새를 가진다. 대부분은 음식에서 비롯된다. 어제 집에 들어섰을 때, 허브와 카레, 사과 향이 느껴졌다. 음식 냄새는 그 집의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한다. 먹는 것을 바꾸는 일은, 집의 아이덴티티를 새로 만들어가는 일과도 같다. 채식은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몸과 생각, 그리고 공간까지 바꾸는 삶의 선택이다.
삶을 이루는 풍경 중, 식탁만큼 사적인 공간도 드물다. 음식과 기억은 마음 속 깊이 스며, 때로는 다른 계절을 불러오고, 오래된 감정을 다시 데워준다. 그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늘을 살아갈 작은 힘을 얻는다.
나의 식탁들은 여러 풍경을 기억 속에 남긴 채 조용히 지나갔지만, 그곳마다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오늘의 식탁 위에는 어떤 빛과 향, 소리가 머물고 있을까. 누구와, 어떤 마음으로 그 공간을 채우고 있을까.
나는 내일의 식탁을 그린다. 아직 낯선 세계일지라도, 망설임 없이 들어가고 싶다.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며, 오늘과 내일, 기억과 감각이 뒤섞인 식탁 위의 풍경을 온전히 마주한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것은 우리가 살아낸 하루하루의 조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식탁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감각과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음식과 사람, 장소가 겹쳐지며 만들어지는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매일의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고 깊이 있게 만든다.
익숙한 식탁 위에서 낯선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의 식탁은 기억을 품고, 내일의 식탁은 새로운 약속을 건넨다.
그리고 그 사이, 한 접시의 여유가 우리를 감각의 풍경으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