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세계
떠올려봤어. 식탁을 마주하며 밥을 먹었던 사람들과의 기억들을. 잘 차린 식탁, 소박하지만 즐거웠던 식탁, 함께 요리를 하고 나눠 먹던 식탁, 까마득히 그리운 식탁…… 밤새워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었던 접이식 식탁도 있었지. 살면서 스쳐갔던 의미 있는 식탁들이 머릿속에서 일렬로 나란히 서서 나를 보고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듯했어. 그 식탁들의 풍경들을 따라가 봤지.
2022년 8월
식탁의 재구성
이사 온 지 벌써 5개월, 일상의 플랫폼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고 있다. 매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북한산의 풍경들, 서울이 아닌 곳에 산다는 것, 지축, 아파트, 공동체, 모두 새것인 도시, 자연의 소리, 숲 냄새. 그리고 장소들을 채우는 사람들과 수많은 생명들. 모두 별개로 존재하고 작동하던 것들이 낯선 조합이 되어 일상 켜켜이 스며든다. 일상의 장소가 바뀜으로써 라이프 스타일의 방향성이 달라진 것이다. 서울의 동네들을 이곳저곳 돌아가며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지만 탈 서울의 임팩트는 생각보다 크게 와닿았다.
주변 환경만큼 집 안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입주 전 아파트는 모델하우스처럼 똑같은 평면의 집들로 켜켜이 쌓여 다른 점을 찾기조차 어려웠지만 몇 개월 지난 지금은 완벽히 다른 집이다. 모든 집의 식탁과 그릇, 그곳을 채우는 가구와 음식, 사람들. 그것들이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다 보면 아파트도 나름 재미있는 건축이다.
무엇보다 일상에 가장 큰 변화를 주고 있는 건 식탁의 풍경이 아닐까 싶다. 식재료를 저장하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말이다.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사 온 후 이제야 비로소 뿌리를 내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재료와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음식을 담는 식탁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식탁이 집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경험해 보고서야 깨닫는다.
집(house)이라는 공간에 사람의 일상이 채워지며 비로소 진짜 집(home)이 완성되는 것처럼 식탁은 하나의 플랫폼이다. 빈 플랫폼 위에 음식들을 완성해 올려놓으면 한 끼의 밥이 완성되고, 그릇의 빈 공간에 요리를 채우면 플레이팅이 완성된다. 집, 식탁, 그릇. 모두 처음엔 비어있지만 일상으로 채워져 간다는 점에서 참 흥미롭다.
이사 후 가장 크게 실감되었던 건 식탁의 변화였다. 이사 전에는 아일랜드 식탁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먹는 행위를 모두 수용했었는데, 지금은 그 공간들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상황에 따라 자리를 골라가며 옮겨 다니며 먹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었다. 자리마다 느끼는 공간감과 감성이 다르고, 건축과 도시를 바라보는 것처럼 집 안을 바라보는 데에도 다양한 시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집 안에서 몇몇의 특정한 위치에 동선이 집중된 채 집 안과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 고정된 시점들을 여러 식탁으로 분산시켜 흩트려 트리고 싶었다.
ㄱ자 주방의 맞은편에는 원래 있던 바 식탁을 두 배의 길이로 만들어 아주 긴 아일랜드 식탁을 배치했다. 식재료를 올려놓고 요리를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고 밥을 먹기에 충분히 넓게. 테이블 한쪽 끝에는 대나무 채반에 가지, 토마토, 호박 같은 채소들을 늘어놓고 오며 가며 언제 먹으면 좋을지 어떻게 요리할지를 궁리하도록 배치해 놓았다. ‘채소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나!’ 뭐 대단한 게 아닌데도 참 풍요로운 느낌이 들게 된다. 예술이나 요리 모두 재료들을 우리 눈앞에 늘어놓고 바라보는 행위는 창조성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북한산이 보이는 창가에는 원목식탁을 배치해 마주 앉아 브런치나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곳에서 밥을 먹을 때는 좀 더 잘 차리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풍경도 하나의 음식인 것처럼 밥을 먹다가 문득 산을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밥 맛이, 술맛이 좋아진다. 밥을 먹는 행위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소파 앞에 놓인 둥근 유리 테이블은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야구를 보거나 커피와 빵을 먹곤 한다. 크기가 제각각인 둥근 접시들로 테이블을 채우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큰 접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모든 음식이 조화롭게 어울려 하나인처럼. 소파라는 가구의 용도에 어울리게 간단한 음식을 먹기 편하게 차려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무르며 밥과 일상이 섞여들 수 있도록 해준다.
식탁은 참 흥미로운 공간이다. 위치와 종류에 따라 밥을 먹는 분위기와 즐거움이 달라진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새 집에서의 밥 먹는 공간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그만큼 식탁의 공간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가족을 묶어주는 장소, 식탁
가장 처음 생각난 식탁은 가족과 함께한 좌식 테이블이다.
우리가 함께 먹던 국, 반찬, 간식, 생일상 위의 잔치 음식들, 새롭게 도전한 낯선 요리, 정체불명의 엑기스, 도시락 반찬, 소풍날의 김밥……
기억이 뭉터기로 잘려 나갔는지 그날그날의 디테일한 에피소드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함께 먹었던 음식들은 기억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계절이 오고 갈 때마다, 날씨에 따라먹던 음식들이 저절로 떠오르는 걸 보면 우리 몸 깊숙이 맛의 DNA가 저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두고두고 우리는 그때를 기억하며 엄마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반복해서 이야기해도 성에 차지 않는다. 재현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때로 돌아갈 수도 다시 맛볼 수도 없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입맛만 다시게 된다.
쩝쩝… 쩝… 쩝……
모든 음식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고유의 맛이 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음식도, 자취를 막 시작했을 때 언니의 음식도, 대학교 앞 식당과 야식 집의 음식도, 유학 시절의 퓨전 요리도, 채식을 하기 시작한 이후의 음식도 모두 고유의 맛이 있다. 맛에 대한 기억들을 문장으로 내뱉다 보니 입 속에 그 맛들이 재현되는 듯하다. 아… 기억날 것 같다. 그 맛과 시그니처 메뉴까지도.
지금까지 거쳐온 음식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곳엔 그 시절 가장 밀접한 거리에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음식에 저장되어 있는 공통된 기억이 나와 그 사람들을 묶어주는 것이다. 음식은 가족을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매듭이다.
하나의 작은 공동체, 식탁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식탁 둘레에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눈을 맞추며 공감의 표현을 하고, 표정의 뉘앙스를 입으로 알아채고, 목소리에서 기분을 듣는다.
우리는 단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할 뿐인데 이미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 묶인 것 같다.
식탁이라는 물리적인 장소는 이런 공유와 공감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식탁의 형태와 조명, 크기, 비율에 따라 다른 종류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유럽의 귀족들이 만찬을 즐기던 폭이 넓고 길이가 긴 식탁처럼 멀리 떨어져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1미터 안팎의 거리 안에서 서로를 인식할 수 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서로의 거리가 관계의 친밀도를 좌우하게 되기 때문이다. 둥근 식탁은 둥근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여럿이 앉아 대화를 하며 밥을 먹기에 제격이다.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아 골고루 분산될 수 있고, 곡선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좀 더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사 자리의 성격에 따라 선택하면 좋다. 둘이 마주 보고 앉는 식탁은 서로에게 집중하기 좋은 배치다.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나 밀린 회포를 풀기에 더할 나위 없다.
식탁 위에는 대부분 조명이 있어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행위에 활기를 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래서 조명이 미치는 범위를 식탁이라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메인 요리를 먹고 식탁 위 조명만 남겨두고 불을 끄면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솔직한 마음이 저절로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평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도해 볼만하다.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나 동료에게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은 빈 말일 때도 있지만 진심이기도 할 것이다. 밥을 함께 먹으며 공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최후의 만찬이라 의식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식탁은 어떤 풍경이 좋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좋아하는 음식을 다 모아놓고 먹기보다는 정찬 코스를 만들어 먹는 과정을 즐겁게 페어링 하고 싶다. 식탁의 레이아웃과 요리들을 스케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메뉴판을 만들어 만찬을 함께 즐길 파트너에게 보내 그에 맞는 와인을 부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채움을 위한 비움의 장소, 식탁
집 안의 물건들은 대부분 고정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음식은 집 안에 없던 것들이다. 음식들을 위한 자리가 식탁 위에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식탁은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비워진 채로 준비되어 있다.
채움을 위해 만들어진 가구들과 채움을 위해 비워져 있는 가구들로 구분해 본다면, 식탁은 후자의 경우다. 비어있는 식탁은 빈 종이와 같다. 글을 쓰든 드로잉을 하든 낙서를 끄적이든 종이의 여백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비어있는 식탁에도 무엇이든 채울 수 있다.
영화 속 관계의 지표가 되는 장소, 식탁
영화 속에는 유난히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 집과 가족의 분위기를 알기 쉬운 장소가 '식탁'이다.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정원에 놓인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끊임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관계의 암시, 변화, 가족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식탁의 풍경은 그들의 일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화가 없는 식탁을 멀리서 카메라가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달그락달그락, 쩝쩝, 주릅 주릅, 티브이 소리… 소리들이 두서없이 반복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소리만 녹음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밥 먹는 행위만이 식탁 위를 스쳐간다. 그곳에서 가족의 관계는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집에서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는 밥을 먹을 때가 가장 많다. 또 오랜만의 가족 모임의 백미는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식탁이라는 공간은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이닝룸’이라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 집이 아니라면 식탁이 있는 자리가 그 역할을 한다. 식탁이 가구이면서 공간이 되는 지점이다. 그곳, 식탁에서 각자의 이야기와 서로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오감을 자극하는 일상의 장소, 식탁
와우… 판타스티코!…. 맛있다 … 쎄 봉 … 굿 … 딜리셔스…
나라마다, 언어마다 음식에 대한 찬사의 말들은 다르게 표현된다. 언어 자체는 이해할 수 없어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뒤의 말들은 왠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단순하게 즐거움을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 즐거운 일이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감각을 자극하는 음식들은 입맛을 돋운다. 음식의 색과 레이아웃을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음미하고 식감을 느끼고 맛에 대해 표현하는 것. 그 순간 우리는 공통의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모두 같을 수는 없지만 달라도 비슷함 속의 다름이라고 볼 수 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음식들을 우리는 좋아한다. 식감과 청각, 미각을 동시에 자극해서일 것이다. 갓 구운 바게트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 모두 먹어버린 기억도 있다. 입에 넣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바나나 튀김, 모래처럼 부스러지는 입자들과 바사삭 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브레 과자, 아사삭 소리를 내며 단짠의 맛을 내는 부각,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식감을 가진 송편…… 음식은 먹는 모든 과정에서 여러 감각을 자극한다.
채식을 하면서 생긴 버릇이 있다. 요리를 하기 전 채소를 다듬으며 맛을 보고 냄새를 맡아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맛을 살리는 요리를 하게 된다. 입 안에서 씹을 때의 식감, 씹으면서 점점 달라지는 맛, 머리를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를 감각하게 된다. 이제껏 익혀먹던 재료들이 날 것으로 먹었을 때 더 매력적이기도 했고, 요리법을 달리해서 더 맛이 좋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감각은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도 열심히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예민하게 귀 기울이면 더 감각할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식탁의 풍경
아침, 각자의 시간에 맞게 오고 가며 식탁 주변이 가장 분주하고 산만한 시간이다.
점심, 모두 외출해 혼자 남아 간단하게 차려놓고 먹는데 뭐가 급한지 후루룩 먹어 치운다. 혼자 있는 책상은 익숙한데 혼자 있는 식탁은 어색하다. 누군가에게 템포를 맞추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템포대로 밥을 먹는 게 영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녁, 마침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밥을 먹는다.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진다면 말이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와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가십거리와 밖에서 있었던 일들이 식탁 위에서 두서없이 오고 간다. 가족 사이에서 오가는 주제와 대화 습관들은 누군가 이런 장면을 보고 있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며 밥 한 끼 속에 식구가 가족이 되어간다.
A 씨의 식탁이 차려지는 과정
식탁 위에 나란히 정갈하게 놓인 젓가락 한 쌍과 숟가락을 본다. 아카시아 나무를 깎아 만든 짙은 색의 수저가 서로 마주 보며 두 사람을 위한 식탁으로 세팅되어 있다. 반찬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채운다. 식탁의 중심에는 뚝배기 받침을 놓아 자리를 비워둔다. 앞 접시 두 개가 수저 옆에 놓인다. 겉절이 접시가 서빙되며 다시 반찬들의 자리를 잡는다. 메인 요리를 담은 접시는 다 차려놓고 위에서 바라보면 가운데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찬들은 그 가장자리에 놓여있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식탁 위에 음식들의 위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보글보글 소리와 하얗게 김을 내뿜으며 된장찌개가 식탁의 중심에 놓인다. 소리와 냄새, 시각적인 에너지까지 식탁 전체를 압도한다. 뚝배기의 기새가 조금 줄어들게 되면 음식 전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비로소 모두 차려진 음식들을 먹을 시간이다. 한 사람은 숟가락을 들고 찌개를 한 입 떠먹는다. 또 한 사람은 젓가락으로 겉절이를 집어 먹는다.
한식과 양식은 식탁이 차려지는 과정이 다르다. 한식은 모두 한 상에 차려 먹는 대신 음식들 사이에 위계가 있어 배치에서 드러난다. 양식은 코스별로 서빙되어 메인 요리는 순서에 중간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식탁이더라도 한식은 꽉 차 있고 양식은 채워져 있는 공간보다는 빈 공간이 더 많다. 식탁이 차려지는 과정과 음식들의 배치가 흥미로운 한식과 차례대로 서빙되는 음식들의 조화가 재미있는 양식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 한식은 먹는 순서나 형식이 없이 자유롭고 양식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식은 밥을 중심으로 반찬과 국, 찌개와의 조화가 중요하고, 양식은 메인 요리를 중심으로 전채요리와 디저트, 와인과의 페어링을 중요시한다. 서로 출발점도 방향성도 다른 한식과 양식. 음식문화의 차이는 곧 문화의 차이이기도 하다. 우리와 그들은 참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채식 이후의 식탁의 풍경
20년 가까이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그 맛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지게 되었던 것 같다. 20년이면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꽤 긴 시간이다. 그러는 동안 식습관이 정립되고 그때까지 먹던 모든 식탁 위의 음식들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집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식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모든 집의 식탁 위의 풍경도, 음식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의 식생활 환경은 대체로 비자발적이다. 가족 안에서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음식 취향에 맞추기 때문에 특히 어린아이에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다. 개인 맞춤형 식단은 가족에서 독립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때부터는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다. 내 몸과 마음, 생각에 가장 잘 맞는 음식들을. 주는 대로, 테이크 아웃으로, 배달로 끼니를 해결하기에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채식으로 바꾼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온몸 구석구석 나는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이 친구, 요즘 먹는 게 달라졌네’라고 내 몸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미식 탐방 프로그램의 몇몇 장면들이 불쾌해질 때도 있을 만큼 식재료나 요리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먹는 것을 바꾼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이지 않았을까 싶다. 맛에 대한 기준도 달라졌다. 식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법이나 깔끔하고 상큼한 소스, 담백한 양념으로 요리를 마무리하는 것이 ‘맛있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맛에 대한 DNA가 있는 것도 같다. 후각과 미각에 저장된 가장 강력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쌓여온 맛과 새로 바꾼 맛에 대한 기준이 오묘하게 공존하게 된다.
집에는 그 집만의 고유의 냄새가 있는데, 그건 대부분 음식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다. 집을 이루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먹는 것을 바꿈으로 해서 우리는 집의 아이덴티티를 새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P.S.
나의 식탁들은 여러 풍경들을
기억 속에 남긴 채 떠나갔지만
그곳에 항상 네가 있었음을
깨닫게 돼.
그리고 지금 난
오늘의 식탁에 대한 생각을 하지.
문득 궁금해져.
오늘, 너의 식탁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