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감, 그 모든 의식

열두 번째 조각

by 귀리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생각들, 아직 덜 익은 빛깔을 띤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충분히 익어야 비로소 손에 잡히고, 너무 늦으면 그 신선함은 사라진다. 프로젝트도 그렇다. 뿌리가 단단히 내려야 흔들림 없이 자라난다.

하지만, 세상은 늘 계획과 다르게 흐른다. 마감 앞에서 ‘완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매 순간 하나의 방향을 택한다. 그 선택들이 결국 모든 결과를 만든다. 준비가 허술한 프로젝트는 불안한 토대 위에 세운 집과 같다. 겉으론 멀쩡하지만, 균열은 조용히 자라나 우리를 끝까지 몰아세운다. 하나의 변수는 또 다른 변수를 부르고, 계획은 흔들린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다. 수많은 마감 속, 그저 한 조각일 뿐이다. 짜릿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의식처럼 문장을 놓는다. 흩어진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남기며, 다시 비움으로 돌아간다.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을 품고 있다.


"의식은 혼돈 위에 질서를 깔아놓는 조용한 손길이다."



마감 전 풍경들


“마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직전까지 밀어붙였던 프로젝트들, 짜릿함과 극심한 압박 사이를 오가던 시간들.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확신은 드물다. 잘못될 수 있는 변수는 늘 숨어 있다. 어디서 생겨나는지 모를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무거워진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 피부가 먼저 감지한다. 혈관은 막히고, 눈은 뻑뻑해지며, 피부에는 전류가 스친다. 잠시 모든 걸 벗어나고 싶다는 유혹이 서서히 피어난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생각을 멈춘다. 머릿속을 휘몰아친 것들을 잠시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듯, 꿈결 같은 부유감 속에서 나는 방향을 잃는다.

하지만… 돌아가야 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다시 생각을 움직인다. 자리를 되찾는 순간,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터질 것이 결국 터졌다.

지침 위반, 계획 오류, 파일 깨짐, 오타, 텍스트와 이미지 불일치, 결정권자의 변심, 인쇄소 문제… 간격을 두고 불길한 소식들이 잇따라 도착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출 수 없다. 완벽을 포기하면, 모든 것이 다시 해결 가능한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이 얽히고,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진다. 필요한 건 단 하나, 유연한 자세와 절실한 마음이다. 집중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집중력이 가장 높아지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극한이 불러낸 에너지가 우리를 마감으로 밀어붙인다.

오류들을 정리하고, 보고서를 인쇄·제본해 KTX로 이동, 마감 직전에 도착했다. 제출을 끝내고 돌아보니, 모두의 얼굴에 사색이 어렸다.

드디어, 마감이다.
우리 앞에 놓였던 난관들을 뚫고, 마침내.

열기는 땀이 되어 살갗 위로 송골송골 맺히고, 몸의 긴장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벽에 등을 기대고서야, 홀로 서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는다. 그럼에도 동료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팀워크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경험한다. 온몸에 퍼지는 고양감이 최고점에 달한다.

보고를 위한 몇 통의 전화, 힘 빠진 대화, 마감에 관한 이야기, 서로 빗나간 멍한 시선들. 이제 의식적으로 시간을 끊어야 할 때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이 긴 여정의 끝을 위해 돌아가는 곳, 그곳에 집이 있다.



잠, 마감 전후의 경계


긴 마감을 지나, 하루가 저물어간다.

잠. 잠을 자야 마감이 끝난다.
에너지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한참 뜬눈으로 누워 있다가, 눈이 스르르 감기는 순간, 잠은 자연스레 찾아온다. 마감 다음 날엔 늘 이렇다.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감각에 놀라 눈을 뜨면, 그제야 깊은 잠에 빠져든다. 쌓였던 피곤함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하거나, 또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경험 같다.

잠은 마감을 경계 짓는 하나의 의식이다. 깊이 빠져들면, 며칠 간 부족했던 수면을 한꺼번에 채우는 듯하다. 끝내 허리가 아파 일어나야 하지만, 그 공백이야말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마감 후 풍경들


"끝맺음은 단순한 닫힘이 아니다. 그것은 조각을 하나씩 내려놓는, 느린 의식의 연속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마감 후의 의식들이다.

찜찜하고 후회스러운 기억, 애착이 큰 프로젝트일수록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 감정들을 정리하며,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감은 수명이 줄어드는 것처럼 힘들지만, 끝내고 나면 후련하다. 동시에 허전하고, 허탈하다. 복합적인 감정의 파도가 우리를 스친다.

카페인을 아무리 들이켜도 벗어나기 힘든 안개 같은 시간. 마감이라는 회색지대 속,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의식이 필요하다. 어딘가 뚝 떨어진 자리에서 감각을 되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아드레날린은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있지만,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현실 감각이 돌아온다. 아직 다하지 못한 완벽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꿈속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에 괴로워하다 깨어난다. 표면 아래 잠들어 있던 잠재의식이 문득 솟구친다. 잔상들이 남았다가 어느 순간 정점을 찍고,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이제 미련을 접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준비가 된다.

본격적인 일상 회복 의식이 시작된다. 밀려 있던 빨래와 청소를 하고, 가뭄 같던 배를 맛있는 음식으로 채우며, 흩어진 도면과 서류를 문서 파쇄기로 밀어 넣으면 조금 더 후련해진다. 음악을 듣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감동의 잔상으로 기억들을 덮어낸다. 그럼에도 감정의 잔재는 남지만, 시간이 흐르면 옅어진다. 우리는 그 의식을 이어간다.

다시 시작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그것이 바로 의식이다.

모든 마감은 과정과 텐션이 다르지만, 그 끝에 남은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지고, 마감은 언제나 돌아온다. 그리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 시간, 그 안에서 나오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마감 휴가 동안 에너지를 비축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일터로 돌아오면 한동안 멍한 상태가 된다. 빈 화면 위에서 마우스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바라보며, 머릿속은 백지와 같다. 마감 사이클 속에서 진짜 휴식은 바로 이때부터다. 다음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충전은 채움이 아니라 비축이다.

보고 싶었던 전시를 보고, 고궁을 산책하며 가을을 느끼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 노트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는다. 작은 것에 집중하며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는다.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차오른다.

다시 시작할 에너지가 천천히 차오를 때까지 우리는 기다린다.




새로운 조각, 새로운 길


너에게 보내는 이 긴 글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마감의 의식은 조용히 흘러간다. 노란 불빛의 스탠드 아래, 빈 종이를 오래도록 응시하면 내가, 그 종이가 될 것만 같다. 여백과 빈칸으로 가득 찬 나. 무언가를 써 내려가며 머릿속 이야기는 사라지지만, 동시에 조금씩 다시 차오른다. 잃음과 얻음,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움을 시도한다.

이제 마지막 조각을 놓는다.
흩어진 감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스며드는 순간, 끝맺음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의식이 된다.

노란 불빛 아래, 남겨진 파편들이 천천히 모여 작은 집을 이룬다. 비로소, 이 작은 감각의 집은 완성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걸음을 떼어,

열두 조각의 집을 닫고, 아직 쓰이지 않은 감각을 향해 문을 연다.

장소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 상상으로.
발걸음마다 바람이 스치고, 빛과 그림자가 함께 흘러간다.
언젠가,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살아 숨 쉴 것이다.


keyword
이전 11화나를 둘러싼 세계의 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