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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Dec 09. 2020

저장의 문화, 풍경이 되어

그 일상들…


열 번째 세계,

수확한 식 재료를 겨울 동안 먹기 위한 준비를 하는 가을 갈무리. 드디어 이 낯선 단어가 떠오르는 계절이 왔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우리의 일상을 거쳐가는 풍경이 나는 참 아름답게 느껴져. 이 즈음 시골 농가의 풍경에서는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벽과 지붕 끝에는 옥수수와 조롱박이 다발을 이루며 매달려 있고, 껍질을 벗겨낸 감이 포도송이처럼 한데 줄줄이 엮여 무리를 짓고 있지.
그 모습까지 집의 입면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 저장 식재료들이 모여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리고 깨닫게 되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저장의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 감탄을 하게 돼.



2020년 12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풍경이란.” _ BGM # Life Story | Olafur Arnals & Nils Frahm


저장의 문화

저장은 생명이 있는 모든 식물, 동물,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원초적인 습성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끊임없는 탐구와 시행착오 끝에 그것이 문화가 되었다.

우리의 저장 문화는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에 준비하고 대비해야만 큰 탈없이 이겨낼 수 있었던 이 땅을 이어온 사람들이 이끌어낸 독특한 식문화가 담겨있다.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는 동안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준비한다.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저장 문화로까지 발전하며 이 시기 동안 사람들의 손을 바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일 년의 농사 끝에 수확한 재료를 잘 다듬고, 오래 먹을 수 있도록 재료를 식초나 소금, 설탕에 절이거나 말려서 보관한다. 날씨와 지역,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저장 문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냉장고 이전의 세계는 저장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 겨울에도 마트에 가면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저장식품을 구할 수 있으니 저장 문화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저장식품을 만드는 일이 번거로운 프로세스일지라도 이런 식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음식 문화의 특성에 따라 저장 음식의 종류와 방식도 다양하다. 밀과 고기가 주식인 유럽과 주식인 밥에 찬을 곁들여 먹는 우리나라의 저장 문화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금세 이해하게 된다.

유럽의 음식 문화에서 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 숙성시켜 먹는 하몽과 비슷한 종류들이 유럽의 곳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그들의 식탁 위에 단골 음식으로 올라간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독일, 북유럽에서는 소시지를 만들어 먹는다. 우유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치즈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며 발전되어 온 치즈는 유럽의 대표적인 저장음식이다. 치즈 자체로 하나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파스타,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이기도 하다.

많은 식물들이 겨울 동안 죽은 듯이 고요히 정지해 있는 사이, 과일은 사람들에게 겨울의 햇빛보다도 더 그리운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욕구가 과일의 저장법을 태어나게 했다. 비계절에도 그 맛을 느끼기 위해 과일을 설탕에 절여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잼을 만든다. 그들은 잼을 통해 한겨울에 과일을 떠올린다. 식초, 소금, 설탕에 절인 피클, 소금에 절인 올리브, 말린 과일, 말린 허브와 같이 요리에 곁들여 먹거나 요리의 재료로 사용되는 저장 식품들도 있다. 유럽의 음식 문화에 어울리는 재료와 방식으로 저장음식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저장 문화는 유럽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소금물에 발효시키며 그 과정에서 태어나는 된장과 간장 그리고 찹쌀, 고춧가루, 엿기름을 섞어 발효시킨 고추장은 국, 찌개, 무침에 깊은 맛을 낸다. 오랜 시간에 걸쳐 발효된 깊은 맛이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양념을 해 발효시켜 먹는 김치는 익는 정도에 따라 맛이 계속 변해가고 먹는 내내 신선한 채소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어떤 재료로 담그냐에 따라 채소 고유의 맛이 배어 나와 모든 김치는 다르다. 장과 김치는 다른 나라의 식 문화와 비교했을 때 비교대상이 없을 만큼 유니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장 방식과 식 재료의 종류도 다양하다. 채소나 곡류를 가루로 만든 조미료, 말린 나물과 해조류, 육류나 해산물을 소금에 절인 젓갈, 소금이나 간장에 절인 장아찌. 저장 방식만큼 요리 방식도 다양하다. 산과 들 어디에서나 나물을 구할 수 있고, 데쳐서 바로 무쳐먹거나 말린 나물을 물에 불려 무쳐먹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어디에서나 식재료를 구하고, 그에 적합한 저장법과 요리법이 셀 수없이 많다. 끊임없는 시도와 연구의 결과다. 밥에 곁들여먹는 찬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저장 문화에 독특한 지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다른 식문화와 비교해 보며 깨닫게 된다. 참, 유연하고 강한 사람들이다.



저장의 풍경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나무가 잎으로 가는 물 길을 차단하는 본능적인 행위는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겨울을 잘 나기 위해 갈무리를 하는 사람들, 갈무리를 하고 난 뒤의 마당, 집 처마 끝, 빨랫줄, 평상이나 마루 위의 풍경을 볼 때면 사람들은 대리만족이라도 하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계절을 준비하는 저장의 행위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동시에 충만함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 겨울이 무르익었을 때 꺼내보면 가을의 냄새가 그곳에 깊게 스며있을 것이다.


계절은 우리 집 거실에도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소파 등받이 위에 홍시가 나란히 줄을 맞춰 늘어서 있다. 햇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익은 정도가 모두 다르다. 조물조물 감을 만져보며 먹을 순서를 정한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만나게 되는 이 모습. 11월과 12월 사이에 잠시 동안 집을 점유하는, 감들이 익어가는 풍경이다. 홍시가 익어가는 시간이 집에 머물다 간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지만 곧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될 감의 풍경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귤의 풍경이 시작될 것이다.

 

가을 갈무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김장의 차례다.

11월의 끄트머리에 겨울, 봄, 여름까지 먹을 김장을 끝냈다. 김장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일 것 같지만 그래도 김장 경력 13년째다(보조이지만 나름 제대로). 이번엔 특별히 비건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첫 김장이라서 양념 속에 들어가는 젓갈, 황태 육수, 생새우, 굴, 액젓을 모두 넣지 않고 과일과 채소만으로 비건 김장을 담갔다.

사과, 배, 감, 마늘, 생강, 양파, 연근, 청각, 고춧가루, 소금, 간장, 찹쌀 죽, 파, 쪽파, 갓.

오래 저장하기 위해 넣었던 염도 높은 재료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맛에 솔직히 조금 놀랐다. 비건 김장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나고, 양념에 절인 배추를 쭉 찢어 넣고 사과와 배를 깍둑썰기해서 겉절이로 무쳐냈다. 그리고 김장재료를 남겨뒀다가 배추 전, 무전, 파전을 해서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의 가을 갈무리를 마무리했다.

하루 동안의 김장의 풍경이 집 안을 머물다 간다.


갈무리의 풍경이 지나가면 이제 저장한 음식들을 즐기는 일만 남는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앉아 차례차례 하나씩 꺼내 저장된 음식과 풍경들을 소환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사람들은 저장을 한다.


모두의 충만한 마음에 깊게 공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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