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세계
마음을 볼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형태가 될까? 눈에 보이는 선으로 그것들을 그려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여러 겹의 결이 이어지듯 하다 끊어지고, 소용돌이치듯 하다 스르륵 힘을 빼고 풀어져 버리는 불규칙적이고 예측불허의 그림일지도 모르겠어. 자기만의 고유한 마음의 결, 생각의 결 같은.
문득 어릴 적 방에 누워 벽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뭔가가 아주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했던 기억이 났어. 어쩌면 식물이 자라듯이 매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결이 자라나는 것이 아닐까, 삶이 다 하는 날까지 계속 자라나 끝도 없이 변해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마음은 가장 보이지 않는 풍경인 것 같아. 그래서 가장 표현하기 어렵지만 자유로운 장소일지도. 그리고 표현해 볼만 한 여지가 넘치는 곳이기도 하고.
2022년 6월
풍경을 상상하다
한동안 좀 무기력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착각이라는 걸 내가 남들에게 증명할 수 있을 거다. 백신 부작용의 흔적들이 내 일상 곳곳에서 나를 좀먹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작년 9월부터니 그럴 만도 하다(아, 생각해 보니 해도 해도 너무 했네). 잠이 오지 않는 아니 잠들 수 없는 새벽이 늘어갔고, 숨 쉬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는 한동안 이어졌다.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새벽은 내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을 자유롭게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심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뭔가를 생각해 내고 만들고 고민하고 즐기는 그 모든 새벽의 시간이 우울과 공포와 불안으로 잠식되어 있었으니. 답답함이 덩어리가 되어 목에 걸려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정체 상태가 왔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다 어느 새벽이었던가? 어차피 잠을 자긴 글렀고, 문득 기분 좋은 풍경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들었다.
뭘 하면 좋을까? 그래, 지금 당장 어딘가에 갈 수 없으니 풍경을 떠올려보자.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까만 바탕에 생각이 이끄는 대로 즉흥적으로 흔들리는 대로 선을 그려나갔다. 그리고는 선으로 둘러싸인 곳에 좋아하는 색을 채워 넣어 풍경을 완성해 나갔다. 마치 드로잉을 시뮬레이션하듯이 풍경을 만들고 그곳에 한 발짝 다가가 섰다.
그러고 보니 그림을 그릴 때 내가 그곳에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곳을 바라본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림 앞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 풍경에서는 오히려 주체가 아니기 어려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마음속에 여러 풍경을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의식과 함께.
겹겹이 층을 이룬 잎들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비쳐 드는 숲을 상상한다. 발바닥을 타고 서서히 스며드는 땅의 차가운 기운이 찰 때까지 촉촉한 흙을 다지며 기다린다. 어떤 소리도 튀어 오르지 않고 온갖 소리들이 뒤섞여 적막하지 않은데 적막한 느낌이 든다. 평온하다. (자연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상상의 씨앗이 되곤 한다)
희고 반짝이는 모래사장과 바다를 상상한다. 소금이 섞인 바람이 심심한 마음에 균형을 맞춰주지 않을까 생각하다 말고 피식 웃는다. 머리카락이 귀 뒤로 살랑살랑 간질거린다. 혀끝에서 짠맛이 난다. 숨구멍마다 바다의 공기가 스며들어 이곳에서 이질감보다는 일체감을 느낀다.
조금 다른 상상도 해 볼까? 폐허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가끔 역으로 뒤집어 생각할 때가 있다. 그 방식이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썩고, 바스러지고, 닳고, 부서지고, 먼지가 쌓이고, 흐릿해지고, 빛바래고, 가라앉고, 조금씩 흔적들이 사라져 간다. 그렇게 조금씩 폐허가 되어가는 과정을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꺼내어 퍼즐 맞추듯 상상의 풍경을 완성해 나간다. 폐허의 냄새, 폐허의 적막함, 폐허의 색과 감촉을 느낀다. 그렇게 한동안 폐허를 경험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쓸쓸하면서 숭고한 감정이 바닥에서 동시에 올라온다. 생기를 잃은 모습이 꼭 나 같기도 해 감정이입이 쉬웠다.
시간을 빨리 감기를 하듯 흘려보내 폐허를 가속화한다. 주인 없는 장소는 이제 식물들에 잠식되고, 동물들의 거처가 되면서 다시 생명의 공간이 된다. 폐허가 생명의 공간으로 바뀌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하니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영화 [보이후드]를 보며 경험한 감동과 조금 비슷한 감정이 올라온다.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섭리 같은 풍경을 떠올리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커다란 일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진다. 그렇게 나는 폐허의 공간에서 희망을 본다.
어떤 풍경을 떠올려도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건 치유의 과정과도 같았다. 많은 밤과 새벽을 그렇게 풍경을 상상하며 지나왔다.
그리고 새벽을 되찾았다.
밤 속의 빛
지금은 다시 원래대로의 새벽이다.
창 밖 아파트에 점점이 켜진 불빛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켜켜이 쌓인 아파트의 집들이 낮 동안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났었는데, 모든 윤곽과 디테일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의 자취만이 창 크기만큼의 빛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불 켜진 창 세 개가 허공에 떠 있다.
서른 개, 스무 개, 열 개 점점 줄어가더니 새벽의 마지막 주자 세 개의 빛이 어둠 속을 밝히고 있다.
새벽을 함께 건너는 동지들.
익명의 동지……
그래서 성립될 수 있는 우리들의 관계.
우리는 깜깜한 밤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눈을 감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밤 속의 빛을 찾아내 한 곳에 모아 둘러보는 상상을 한다. 빙그르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새벽을 건너는 사람들의 풍경을 본다. 왠지 그 모든 빛들이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되찾은 빛처럼.
P.S.
새벽을 제대로 보내서일까? 문득 머리 위로 조명이 켜지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빛이 몸 깊은 곳까지 투과해 스며드는 듯했지. 유난히 아이디어가 넘치고 글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드로잉의 세계가 조금 넓어진 것 같고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잘 떠올랐고 거울 속 얼굴이 좀 더 나아 보였고 차분해졌고 숨 쉬는 것이 거의 완벽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