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울마라톤을 다녀온 후기
아니, 나에게는 새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서울마라톤' 10KM 레이스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마라톤을 잘 모르는 나는, 우연히 작년 10월쯤 '나 혼자 산다'에 나온 기안84의 마라톤 출전 에피소드를 보고 폭풍 감동을 느껴서 회사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하던 중에 추천을 받아 별 생각없이 신청한 것이 '서울마라톤'
이었는데, 이 마라톤의 원신은, 알고보니 1931년부터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최대, 최고로 불리는 '동아마라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대회가 코 앞으로 왔음에도, 나는 평소에 집 앞 탄천에 나가서, 5km 내외를 가볍게 뛰고 오는 것이 전부였었다. 심지어 3km정도를 뛰고, 반환점을 돌기 전에 힘들면 잠시 걷기도 했었다.
그래서 레이스가 시작되는 일요일을 하루 이틀 앞두고는, 정말 10km를 완주할 수 있을까하는 나에 대한 의심과 결국 실패할거라는 비관이 마음속에 꽉 차기도 했었다.
그래도 전날 밤이 되어서는 다음 날 입을 옷을 꺼내서 잘 접어두고, 잘 달려보자는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잠시 응원해주며 잠에 들었다.
대회 당일, 보통 같았으면 한참 잠에 빠져있을 5시 정도에 알람소리에 깨서 일어났다.
걱정보다는 몸이 훨씬 가벼워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잠실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근처 빌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러닝 복장을 갖춘 채로 멀리 보이는 종합운동장을 향해 걸어갔다.
나처럼 주차를 하고 집결지로 향하는 참가자들이 생각보다 엄청 많이 있었다. 다들 티셔츠에는 배번호를 하고 있었고,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같은 여러 브랜드의 멋들어진 카본화를 신고 있었다.
화려한 색상의 양말이나, 티셔츠, 모자를 맞춰 입은 에너지 넘치는 커플, 소박하지만 잘 갖춰진 복장으로 편안하게 온 중년의 부부, 단체 티셔츠를 입고 클럽 깃발까지 들고 온 러닝 크루들, 마라톤을 하러 한국에 온건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사는건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너무 잘 뛸것 같아보이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그런 군중 속에서 나만 혼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살짝 위축되기도 했지만, 금새 10km동안 내 러닝에 고독하게 집중할 수 있을것 같다는 기대감에 몸에서 살짝 소름도 돋았다.
종합운동장에 가까워질수록,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참가자들의 인파에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물품보관소에 자켓과 지갑, 차키등을 맡기고 출발선쪽으로 향했다. 엄청나게 많은 참가자들 때문에, 출발선으로부터 200미터 이상은 참가자들이 늘어서있었다. 각 그룹별로 순차적으로 출발을 했고, 나는 공인기록이 없으므로 가장 마지막 조인 F조에 배정되어 출발했다.
내 주위의 수백명의 발소리가 기분좋게 귀에 울려퍼졌다. 처음부터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한가지는, 절대 오버페이스 하지말자 였다. 내 앞에 사람을 제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지만,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고 키로당 6분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왕복 6~8차선 도로 한가운데서 러닝을 하는 기분은 굉장히 새로웠고, 평온한 기분을 나에게 주었다. 달리는 방향에 서있는 거대한 롯데 월드타워가 안개에 살짝 가려져 있었는데, 마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영웅의 석상이 미물같은 여러명의 인간을 호기심이 가득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3~4키로까지는 생각보다 호흡이 너무 좋았고, 발도 가벼워서 나도 모르게 페이스를 넘겨서 빠르게 달리기도 했다. 반환점인 5키로 지점 직전에서 다운힐, 업힐이 있는 지하차도를 달리는 구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미친듯이 화이팅을 외치며 소리치는 장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5키로 지점, 절반이 지났기 때문에 반환점을 돌아 다시 출발했던 곳을 향하면서, 지쳤던 몸에 힘이 붙었다.
지금까지 뛴 것 그대로 한 번만 더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응원했다. 그러한 희망 때문인지 호흡이나 몸도 더 가벼워져서, 다리를 더 힘차게 구를 수 있었다.
역시나, 6~7키로 구간에서 힘이 붙은것에 흥분했던 마음 때문에 평균 페이스보다 더 빠르게 달리다보니
8키로 구간 이후부터 몸이 힘든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코로 호흡하는데 집중하면서, 몸에 불필요한 힘을 빼면서 달리려고 노력했다. 결승선에 점점 가까워져 갈 수록, 아는 사람들이 아니어도 열렬하게 화이팅을 외쳐주는 관중분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본인이 뛰는 것도 아닌데, 본인이 아닌 사람도 아니지만, 이 레이스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힘차게 응원해주며 박수를 보내주는 관중분들을 보면서 반성도 하게 됐다. 나는 언젠가부터, 쓸데없이 에너지를 쏟아가며 기분이 들뜨는 것을 경계하다보니, 잘 모르는 사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되면 너무 냉소적으로 굴면서 삶을 살았던 것 아닐까?
9키로 지점. 롯데타워도 가까이 보이고, 점점 커져가는 집결지의 행사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골인지점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내 허벅지가 점점 뻐근해지며 잠겨오는 것도 느껴졌다. 고통스럽다는 생각때문인지, 빠르지 않은 페이스에도 갑자기 호흡이 흐트러졌다. 팔치기를 하며 계속 움직이고 있던 어깨도 뭉쳐서 더욱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지만, 길게 호흡을 해가며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는 몸들을 안정시켰다.
박수 소리가 넘쳐나는 코너를 돌아보니 드디어 결승선의 컬러풀한 문이 보였다. 이제 다왔다는 생각에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보람, 희열, 행복을 느끼며 웃으면서 한발 한발 내딛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10키로미터라는 거리를 뛰었다는 작다면 작은 사실이 내 삶에 작은 파동을 하나 일으킨 것 같다. 나름의 계획대로 무리하지 않고 일정한 페이스로 꾸준히 달린것도 만족스럽다.
무언가를 해낸 후, 주변에 기뻐하는 사람들이나, 각종 스포츠브랜드의 팝업스토어, 기념사진 촬영존 등 축제같은 분위기 속에서 흥분했던 감정들을 기분 좋게, 고요하게 진정시켜나갔다. 이것저것 구경을 살짝 하고, 보관소에 맡긴 물품을 찾아서 주차장으로 갈 때 쯤에는 햇살도 너무 좋았고, 날씨도 포근했다.
봄이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와서는 뛰었던 순간들이 자꾸 기억에 맴돌아서, 러닝을 하는 유튜브들을 찾아보고
바로 3월 말일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앞으로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꾸준히 달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