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부상을 자주 당하는 선수를 일컬어 유리몸, 영어로는 인저리 프론(Injury Prone)이라 부른다. 프로 선수는 경기나 훈련 중 부상을 입거나 타고나길 약할 수 있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운동 마니아였다.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초등학교’로 현판이 바뀐 마지막 세대이자, 경북의 작은 시골 마을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뛰놀며 자라온 보통 남자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내 몸은 결코 유리 같지 않았다. 연년생인 형은 나보다 덩치는 컸지만 입원실 단골손님이었고, 수술 전 환자복을 입은 형의 침대에서 “나도 입원할래!”를 외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갓 태어났을 때 나의 얼굴은 방실방실한 보름달 같이 귀여웠다. 최근 태어난 나의 아들과 비교해도 월등하게 귀여웠으니. (아들 미안…하지만 아빤 객관적이란다) 지금도 엄마를 만날 때면 왜 귀여웠던 나를 역변시켰냐며 투덜거린다.
8개월이 된 아들도 나를 닮아서 꽤 귀여운 편이다. 동네 산책을 할 때나 엘리베이터에서나 마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언제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동통한 얼굴과 하얀 깨끗한 피부로 1차, 낯선 사람을 보면 더욱 활짝 웃는 얼굴로 2차,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아들의 해밝은 미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귀엽다면서 말을 건다. 나의 어릴 적 사진에서의 귀여움은 뭐랄까, 동그란 형태의 얼굴에 진한 눈썹과 적당하게 크고 가로로 긴 눈의 조화는 마치 하기스 아기 기저귀 모델의 모습이랄까?
토실했던 나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세로로 길어지고 동시에 편식이 시작됐다. 친구들은 날 ‘말ㄷㄱㄹ’이라 불렀다. 나의 편식 역사는 참 길었다. 무려 22살 군대 가기 전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흔히들 군대 가서 편식 습관을 고쳤나 보네?! 착각할 수 있는데 정말 불현듯 한 순간의 결심이었다.
엄마는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5남매의 외동딸이었다. 도보 10분 거리의 학교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버스비를 손에 쥐어 줄 만큼 외동딸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았다. 결혼할 당시 아빠말로는 먹는 음식이 고작 5가지뿐이었다나. 그만큼 오냐오냐 귀하게 자라면서 엄마의 편식도 자라왔다. 역시 원인은 밖에서 찾는 게 마음 건강에 좋다.
지금 기억나는 나의 식습관은 현재 부모가 된 나의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물론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약한 비위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 중에 하나는 미운 5세 시절 검정콩이 들어 있는 잡곡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밥그릇 밑이나 밥상 밑에 검정콩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숨기기 바빴다.
통통한 보름달 같던 얼굴이 점점 길어지면서 편식을 전해준 엄마의 걱정도 심해졌다. 역시 유전 때문인가 보다. 그렇게 편식이 심해질 때마다 약해진 엄마의 마음으로 식탁에 자주 등장하던 친구가 있다. 바로 비엔나소시지다.
노릇하게 구워진 비엔나소시지에 케첩을 뿌려서 먹은 기억은 어렴풋한 과거 중에서 꽤 선명하다. 그만큼 자주 많이 먹었던 메뉴였다. 지금도 엄마와 아내가 나의 과거 얘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니 말이다. 22년 나의 편식 생활의 베프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이후 새로운 절친(?) 2명이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릴 적 편식이 과연 내 ‘유리몸’의 시작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