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소리에 답할 수 있다면

『야성의 부름 』/ 잭 런던

by 이창우


우리 안의 '야성'을 혹시 기억하시는가. 야성 따윈 문명화된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가. 문명이 주는 이 안락함과 편리함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 같은 인간은 내 편한대로 사는 족속이다 보니 더욱 멀고 먼 이야기 같다는 거지. 하지만 그대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가. 이 문명이 주는 '야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시는가.



이 책의 저자 잭 런던은 1897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참여해 알래스카로 갔다가 다른 사람들이 금에 관심을 가질 때 대자연의 위력과 혹한의 모험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지. 문명과 야만은 대척점에 있지는 않다고들 말한다. 문명에서 필요조건으로 어쩌면 야만이 시작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경우는 현대사회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자, 쉽게 생각해 보자. 나는 왜 죽으라고 공부해서 대학을 진학해야 하는가. 그 행위가 타자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셨는가. 그렇게 열나게 공부하고 대학에 가야만 하는 것이 사회적 요구에서 오는 강제라고는 생각해 보셨는가. 그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 대접을 받을 수도 없고, 좋은 직장을 가질 수도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고 말하고 싶지 않으신가.



이미 현대사회는 '야성의 부름'에 답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일지 모르겠다. 스물의 시간을 너무 멀리 지나온 나로서 만나는 감정은 '지금'의 이십 대가 만나는 현실을 고스란히 지나가야지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지 싶었다. 시행착오를 건너뛸 수는 이십 대의 삶은 어쩌면 너무도 힘겨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그 시간을 직시할 수 있는 이라면 자기의 야성을 잃지 않으려는 힘을 지켜가려 하겠지.


나는 약간의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기도 했기에 답답하기도 했고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겪어야 성장한다는 말은 하기 싫다. 빠져나와야 할 고통이라면 굳이 겪고 나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은 그대의 선택에서 시작되었음을, 그 선택에 나는 얼마나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가도 생각하셔야겠지. 어느 날 내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 길들이지 않은 야성의 내가 소리를 낸다.


어떤 이는 이 글을 읽으며 대학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뭐야? 라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적어도 스스로 선택한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그대였음 좋겠다. '지금'을 더 잘 알아야 '야성의 부름'에 가능한 자기의 답을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내 안에 숨겨진 보물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진 않았을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야성을 발휘했어야 할까? 물론 정답 같은 거 없다. 내 질문에 답은 내가 만드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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