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 건넴

청춘열차

[기억하기] 2015년 1월 25일

by 이창우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평온한 일상에서 불쑥 쳐들어와 나를 기겁하게 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잔인한 4월이라는 제목으로 해마다 치르는 가슴앓이를 했었죠. 그 병이 나아진 건 불과 몇 년 안 되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을 가슴에 담고 꽤 오랜 시간 살아왔습니다. 그런 4월이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던 십 대들의 죽음으로 다시 찾아들어 잔인해진 4월의 봄은 내 삶의 빛을 바꾸어놓고 말았지요. 2014년 4월 16일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2011년 감독 필리프 팔라도 감독의 <라자르 선생님>에서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겪는 시간을 또 다른 죽음을 겪은 라자르 선생과 만나게 하면서 전개됩니다. 한국사회에서 내 주변의 죽음은 아니어도 참으로 많은 죽음을 만납니다.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죽음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짜증 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만큼은 외면하기가 쉽지 않지요. 어느 날 갑자기 만난 담임선생님의 자살은 아이들에게 ‘상실’이었습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것을 한 학생이 발견합니다. 그 죽음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후임 선생 찾기가 쉽지 않던 학교 교장에게 라자르가 찾아오고 교장은 그를 채용합니다. 라자르는 알제리에서 온 망명자로, 테러로 부인과 두 자녀를 잃고 캐나다로의 망명 신청을 진행 중이었죠. 사실 라자르의 부인이 교사로 일했을 뿐 식당 경영 등의 일을 한 라자르 자신은 아이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라자르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을 하나둘씩 발견합니다.


수업시간에 라자르 선생을 잘 따르는 알리스는 학교 이야기를 발표합니다.


“큰 파이프에 파란 스카프로 선생님은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인생에 실망하셨을 거예요.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것은 의자를 차서 넘어뜨린 거였어요. 가끔 난 선생님이 공격적인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린 공격적으로 굴면 벌을 받지만 우린 마르틴느 선생님께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셨으니까요.”





영화에서 라자르 선생은 마지막 수업을 하며 ‘우화’를 들려줍니다. 직접 쓴 이 우화는 라자르 선생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는 결국 자신에게 닥친 가족의 죽음을 발설합니다.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 온 것이었죠. 가족을 잃은 선생과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이 진정으로 만난 겁니다. 표현되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엔 금지된 이야기, 죽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도 들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소통하고 싶어 합니다. 그저 잊어버리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나 상담전문가와 마주하는 시간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거였죠. 누군가는 ‘상실’에 대해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말이죠.


이 영화는 선생이 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보편적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높이를 맞추어 슬픔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함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들려줍니다. 섬세하고 사려 깊게 마음을 파고드는 이 영화는 지난 1월 팽목항으로 달려가는 청춘열차에 함께 한 나의 시간과 겹쳐집니다. 한 번은 다녀와야만 했던 그 바다를 결국 다녀왔습니다.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라도 다녀와야만 했던 그곳, 개인적인 숙제를 풀어내기 위해 청춘열차에 올랐죠. 나의 자리가 뒤바뀐 시간대에 내가 있었습니다. 청춘열차에 몸을 담아야 했던 각자의 마음들이 모여 어쩌면 마지막 기행이 될지도 모를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벗들과의 기차여행은 내 그리움의 그 어느 날로 그렇게 남겨졌습니다.


팽목항으로 향한 무박의 청춘열차여행은 동행인들과 나눌 그리 많은 말이 없어도 밤기운과 열차의 시끌벅적함으로 생기가 넘칩니다. 이제 막 스물이 된 벗들처럼 내 스물의 첫 열차여행도 이렇게 무박의 밤으로 지나는 시간이었죠. 그때는 홀로 시작하는 세상을 향한 '출발'의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세상을 떠날 준비의 마음이라 해야 할까요. 이곳의 바람은 온통 얼룩져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285일째 되는 날의 팽목항은 어린 친구들의 넋으로 출렁입니다. 그동안 눈으로 보고 온 마음으로 좇던 느낌들이 온몸에 날 선 기운으로 마구 달려듭니다.


설움과 흐느낌, 오열하며 쌓인 분노들이 노란 리본을 여전히 펄럭이게 하고 바람으로 소리 내는 풍경들은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울음 웁니다, 팽목항에 놓인 구조물들은 유령처럼 나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이어진 열린 하늘이 더는 빛나지 않았죠. 팽목항의 해는 다시 떠오르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이는 바람에 불을 댕겨 떠나보내는 연등에 마음을 담아 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결국, 스스로를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몸짓으로 멈추어버린다면 이 모든 괴로움은 다시, 다시 되풀이되고 말 텐데 말이지요.


정지된 시간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로 돌아올 시간은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나온 시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따뜻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낯익음은 언제나 불쑥 마주할 낯섦을 위해 필요합니다. 잔인한 4월의 봄과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그곳에서 마무리하며 다시, 시작할 걸음을 준비합니다. 상실은 또 다른 이름의 머무름으로 남겨져 불쑥 죽음을 만날 겁니다. 끊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 한국사회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요. 죽음에 익숙한 사회, 살아있는 자들의 상실은 함께 채워가야 하지 않을지요.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과 조속한 진상규명을 위한 도보행진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흐느껴 목메

시퍼런 바다

내 설움만 넘친다


[세월호 참사] 200일에 85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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