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자르 선생님 / 필리프 팔라도 감독
2011년 감독 필리프 팔라도 감독의 <라자르 선생님>은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에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겪는 시간을 또 다른 죽음을 겪은 라자르 선생과 만나게 하면서 전개됩니다. 한국사회에서 내 주변의 죽음은 아니어도 참으로 많은 죽음을 만납니다. 누군가에게는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죽음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짜증 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만큼은 외면하기가 쉽지 않지요.
어느 날 갑자기 만난 담임선생님의 자살은 아이들에게 ‘상실’이었습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것을 한 학생이 발견합니다. 그 죽음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후임 선생 찾기가 쉽지 않던 학교 교장에게 라자르가 찾아오고 교장은 그를 채용합니다.
라자르는 알제리에서 온 망명자로, 테러로 부인과 두 자녀를 잃고 캐나다로의 망명 신청을 진행 중이었죠. 사실 라자르 부인이 교사로 일했을 뿐 식당 경영 등의 일을 한 라자르 자신은 아이들을 가르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라자르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을 하나둘씩 발견합니다.
“큰 파이프에 파란 스카프로 선생님은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인생에 실망하셨을 거예요.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것은 의자를 차서 넘어뜨린 거였어요. 가끔 난 선생님이 공격적인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린 공격적으로 굴면 벌을 받지만 우린 마르틴느 선생님께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셨으니까요.”
수업시간에 라자르 선생을 잘 따르는 알리스는 학교 이야기를 발표합니다.
영화에서 라자르 선생은 마지막 수업을 하며 ‘우화’를 들려줍니다. 직접 쓴 이 우화는 라자르 선생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는 결국 자신에게 닥친 가족의 죽음을 발설합니다. 그래야만 하는 시간이 온 것이었죠. 가족을 잃은 선생과 선생님을 잃은 아이들 마음이 닿게 됩니다.
표현되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엔 금지된 이야기, 죽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런 이유도 들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소통하고 싶어 합니다. 그저 잊어버리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나 상담전문가와 마주하는 시간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거였죠. 누군가는 ‘상실’에 대해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말이죠.
이 영화는 선생이 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보편적 수직관계에서 벗어납니다. 죽음 앞에서 마음의 눈높이를 맞추어 슬픔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함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들려줍니다. 섬세하고 사려 깊게 마음을 파고드는 이 영화는 2015년 1월, 팽목항으로 밤새 달려가는 청춘열차에 함께 한 내 시간과 겹쳐집니다.
한 번은 다녀와야만 했던 그 바다를 결국 다녀와야 했습니다.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라도 다녀와야만 했던 그곳, 개인적인 숙제를 풀어내기 위해 청춘열차에 올랐죠. 자리가 뒤바뀐 시간 대에 내가 있었습니다. 청춘열차에 몸을 담아야 했던 청년들 각자의 마음이 모여 어쩌면 그들과 나눌 마지막 기행이 될지도 모를 야간기차여행은 내 그리움의 어느 날로 그렇게 남겨졌습니다.
무박의 야간열차여행은 동행인들과 나눌 그리 많은 말이 없어도 밤기운과 열차의 시끌벅적함으로 생기가 넘칩니다. 기차에 몸 담은 청년들처럼 내 스물의 첫 열차여행도 이렇게 무박의 밤으로 지나는 시간이었죠. 그때는 홀로 시작하는 세상을 향한 '출발'의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세상을 떠날 준비의 마음이라 해야 할까요.
이곳 팽목항의 바람은 온통 얼룩져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285일째 되던 그날의 바다는 어린 친구들의 넋으로 출렁입니다. 그동안 눈으로 보고 온 마음으로 좇던 느낌들이 온몸에 날 선 기운으로 마구 달려듭니다. 설움과 흐느낌, 오열하며 쌓인 분노들이 노란 리본을 여전히 펄럭이게 하고 바람으로 소리 내는 풍경들은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울음 웁니다.
팽목항에 놓인 구조물들은 유령처럼 나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이어진 열린 하늘이 더는 빛나지 않았죠. 팽목항의 해는 다시 떠오르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뒤로하고 내일은 어김없이 태양이 떠오르던걸요. 이는 바람에 불을 댕겨 떠나보내는 연등에 마음을 담아 봅니다만 이런 일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 스스로를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몸짓으로 멈추어버린다면 다시 되풀이되고 말 텐데 말이지요.
정지된 시간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재로 돌아올 시간은 또 다른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나온 시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따뜻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낯익음은 언제나 불쑥 마주할 낯섦을 위해 필요합니다. 잔인한 4월의 봄과 더불어 지나온 시간들을 그곳에서 마무리하며 다시, 시작할 걸음을 준비할 밖에요.
상실은 또 다른 이름의 머무름으로 남겨져 불쑥 죽음을 만날 겁니다. 끊이지 않는 죽음의 행렬, 한국사회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요. 죽음에 익숙한 사회, 살아있는 자들이 부둥켜안고 평생을 지나야 할 상실은 함께 채워가야 하지 않을지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찾는 행진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고 없이 늘 죽음이 찾아옵니다. 평온한 일상에서 불쑥 쳐들어와 나를 기겁하게 합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잔인한 4월이라는 제목으로 해마다 치르는 가슴앓이를 했었죠. 그 병이 나아진 건 불과 몇 년 안 되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을 가슴에 담고 꽤 오랜 시간 살아왔습니다. 그런 4월이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던 십 대들의 죽음으로 다시 찾아들어 잔인해진 4월의 봄은 내 삶의 빛을 바꾸어놓고 말았습니다.
그 4월이 네 번 지났습니다. 이제 죽음은 내 주변을 배회하며 예고 없이 들이닥칩니다. 진보 정치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한 길을 외롭게 걸어왔던 거인의 죽음은 소소한 일상에서 조차 충격입니다. 고 노회찬 의원의 삶의 여정은 저로서는 감히 입에 올릴 엄두도 나지 않는 신념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정치가 실종된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던 정치가입니다. 고인 스스로 언급한 잘못된 선택이 누구라도 저지를 수 있는 현실 문제라는 사실에 더 참담합니다.
정치를 외면해도 생활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고, 더욱이 내 방식의 삶을 살아오는데 큰 문제 또한 없었습니다. 선진 사회와 후진의 차이는 '사람'에 의존하느냐 '자본'에 의존하느냐에 달린 문제로 보거든요. 진보 세력이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에만 급급하게 대처하기보다는 멀리 내다보며 미래 세력을 양성해야 하는 간절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육 전체의 혁신은 당장 힘들다 해도 그것은 위로부터의 시작으로 준비되면 열릴 수 있는 가능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위로부터 가능한 권력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고요. 정당에 무조건 맡길 것이 아니라 십 대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입문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합니다.
왜 전문적인 차세대 정치인의 양성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지. 진보의 거인이 쓰러진 지금이 그때 일지 모릅니다. 너무 늦은 것만 같을 때, 그것을 깨달을 때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정치인'이기보다는 '정치가'로서 그의 철학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조율된 사회를 위해서 차세대 진보 세력은 너무도 간절한 바람입니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교과서의 죽은 지식으로만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겠죠. 정치 무관심은 역진을 불러옵니다. 진보의 신세대는 거인의 죽음을 기억하고 분연히 일어날 일이 숙제로 남았나 봅니다.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와 광장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새 날이 올 믿음을 잃지 않겠습니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인류는 다시 진보를 위한 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죠. 인류는 그렇게 진보해왔습니다. 이제 카페에서 향기 나는 커피를 마주하고 정치와 마음껏 노는 일이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풍경으로 보일 사회를 상상합니다. 정치가 얼마나 현실적인 영역인지 같이 놀다 보면 저절로 실감하게 되니까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 과정에는 수많은 이집트 백성들의 고통이 담겨있습니다. 현대 사회 거대한 구조물인 민주주의라는 피라미드는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개인들이 치른 희생으로 큰 힘을 건네 왔습니다. 피라미드를 쌓아 가는데 각자의 역할이 소홀하여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피라미드라는 구조물은, 민주주의의 가치는 하나의 점으로 향해 나아갈 수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진보세력의 상실. 그것을 채워나갈 힘을 모으는 일이 남았습니다. 진보정치의 거인이 그의 삶으로 뿌리고 멈춘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발자국을 따라 성큼 걸어갈 진보의 당찬 행진을 바랍니다. 죽은 자가 잃어버린 말을 이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몫이겠지요. 오늘은 주황빛으로 물든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면서 뜨건 바람마저 가슴에 담고 싶어 집니다. 거인의 그림자가, 그가 드리워주던 그늘이 몹시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