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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Aug 11. 2018

위장의 시대, 노동존중은 가능한가

[영화] 실크우드 / 마이크 니콜스 감독

 석유파동이 있었던 후 1974년 미국 카마기(Kerr-McGee's)사의 오클라호마 공장에서 플루토늄을 취급하던 캐런 실크우드란 젊은 여성노동자가 11월 13일 교통사고로 즉사합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죽음이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많아 이목을 끌게 된 “실크우드 사건”을 담았습니다.

      

 영화 실크우드의 실존인물 캐런 실크우드(Karen Silkwood)는 카-마기 사에서 시간당 4달러를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였습니다. 실제 결혼에 한번 실패했고(사회적으로는 미혼모) 전 남편과 그녀의 세 자녀와는 멀리 떨어져, 가끔 자신의 자녀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지요.     

 

 1972년부터 카-마기(Kerr-McGee's)사에서 플루토늄과 우라늄 합성물에서 연료봉 추출, 연마 작업등을 했습니다. 영화에서 그녀 말에 따르자면, 사측에서 업무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만 들었을 뿐 위험성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해요. 일을 시작한 지 2년 후인 74년 그녀가 죽기 한 달 전이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작업이 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최근에야 한국 사회에도 삼성 반도체 노동자 문제가 매듭을 지었나 봅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11년을 이어왔습니다. 그동안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해왔지만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 권력은 꿈쩍도 안 했죠. 그럴 수 있는 한국사회가 이제 조금 달라지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고통이 멈추지 않을 자본의 질주라 생각하면 노동의 가치 복원은 너무도 절실합니다.   


  


 영화는 캐런 실크우드의 일대기를 그렸는데 일상의 한 사람이 노동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 있죠. 그런 그녀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눈을 뜨고 그것을 널리 알리려고 했던 용기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영화에서도 보여주지만 애초에 회사 측은 생산량만 채우면 다른 것들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생산을 위한 노동 환경 따위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거죠. 회사 측에서 제공된 작업환경에서 노동자 스스로 적응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일을 그만두거나 일을 계속하거나 뿐입니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선택이 아니죠.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죠. 살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노동하기 위해 살아있어야 하는지요. 노동자는 힘을 합해도 회사 측을 압도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어느 정도 만족감에 맞추어 합의를 이루어내는 데 필요한 것이 조합의 힘인데 이 과정에서 용기는 늘 제한적일 수 있는 거죠.      


 실제 영화 실크우드 속에서 작업장의 환경을 보면, 너무나도 엉성하고 열악합니다.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는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회사에서 괜찮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있는 겁니다.       


 실크우드는 자신의 작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런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노조(OCAW, Oil, Chemical & Atomic Workers Union)에 참여하고 활동가로서 변모하는 계기로 발전합니다. 결국, 그녀는 노조 간부들과 함께 자주 회합을 하며 워싱턴까지 찾아가고 AEC(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증언까지 하기에 이르죠.     

 그들에게 여러 가지 부당한 노동조건이나, 열악한 환경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게 됩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며 회사 측의 허술한 관리나 허점을 찾아내기 위한 자료가 필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행위들은 회사 측뿐 아니라 같은 동료들과 남자 친구와도 갈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남자 친구는 공장을 그만두고 캐런의 집에서 떠나게 돼요.          



 “또 적는 거야?”
 “노조에선 이런 정보가 필요해요.”
 "캐런, 난 이 일을 좋아한다고." 


 동료인 그들이 노조 활동을 하는 카렌을 피합니다. 캐런 실크우드란 한 사람의 용기로 노동자 전체, 노동조합의 힘은 발휘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갈 때쯤 영화는 불안하게 무언가를 암시하며 예고해 줍니다. 진실을 밝힐 용기를 냈던 한 사람의 희생이 여전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와 노동 법규에 관심을 두게 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당장 내 삶과 노동, 목숨을 위해서 말이죠.      


 영화 속에서는 그녀를 탄압한 사측에 대한 비판과 진실이 알려지게 되면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까 우려하는 소심한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전해집니다. 다소 관료적이며 소극적으로 하는 시늉만을 보이게 일을 처리하려는 엘리트 활동가들도 보이고요. 여기,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 배제된 사회구조로 반복되는 한국사회의 노동 현실이 우울하게 다가옵니다.     


  한국 사회, 노동 환경은 어떤가요. 지난 8월 5일로 쌍용차 노동자들이 함께 살자고, 생존권을 지키자고 투쟁한 지 만 9년이 되었습니다. 해고 노동자들은 아직도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죠.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복직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거든요. 약속만 과잉이고 해결되는 것은 없기에 다시 나서게 되었답니다.     

 

     

 정리해고와 국가폭력으로 인해 숨져간 30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 문제는 한국사회 노동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기간제, 단시간, 간접고용 등 불안정 고용일수록 재해에 더욱 취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노동자의 죽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노동 3권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그동안 노조 결성부터 사측의 방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정부 역할은 너무 미온적입니다.        

   

 영화에서 실크우드가 발휘한 용기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간 수집했던 자료들을 가지고 뉴욕 타임스 기자인 데이비드 번햄( David Burnham)을 만나러 가던 중 사고를 당하고 즉사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올라오는 내용입니다. 아무도 진실에 관심 두지 않았거나 밝혀낼 수조차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이죠.      


 캐런의 사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서류의 존재도 불명확하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1년 뒤 공장은 문을 닫았다.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그에게 펼쳐질 가을은 ‘정기국회’와 ‘국정감사’에 시선이 꽂힐 수 있겠지요. 노동에 관심이 있다면 우선은 폭염으로 터질 듯한 아스팔트에서 건물 위에서 외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어렵겠지요.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최근 교육 혁신과 관련된 교육부의 입장과 방향에 주목할 테지요.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기 시선으로 세상은 돌아가고는 있나 봅니다. 지구가 소리 소문 없이 어쨌거나 돌고 있듯이요.  

   

 내게 노동은 부지런 떠는 것이고 게으른 자로서 안 하면 좋을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노동 없이 삶은 존재할 수 없고 더욱이 돈 없이 생존은 불가능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으니 움직여야 하는 건 맞습니다. 최근 느낀 건데 돈 없으면 무척 부지런해지더라고요. 배고프면 시켜먹던 것을 돈 없으면 귀찮아도 해 먹어야 하고, 그때면 나도 모르게 한 끼 식사비면 쌀값의 얼마를 치르는 것인지 자동으로 숫자놀이를 하게 됩니다.      


 노동자가 자기의 위험을 예감하면서도 노동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는 삶을 위한 노동이 되었기 때문이겠죠. 나는 이렇게 바꿔보렵니다. 삶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위한 삶"은 어떨지. 가능할까요? 개인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노동의 강도 문제이지 노동 없는 삶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내 몸이 움직임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이런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을 위해 내 삶이 존재하길 바란다고요. 어느 일 중독자의 고백도 아니고 한자를 풀이한 것이라면 어떤가요. 너무 단순하다면 여기부터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겠죠. 노동(勞動)은 몸을 움직여 일함. 요거였어요. 밥을 짓는 일. 내 몸을 움직여 쌀 씻고 전기밥통 눈금에 맞춰 물을 붓고 취사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나의 이 노동으로 한 끼 밥값이 줄어듭니다. 반찬 만들고.. 기타 등등 내가 해 먹으면 밥값이 많이 줄어든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죠. 그러니 우리에게 노동은 삶이 아니라 “삶이 노동이라는 거”에 초점을 두고 싶습니다.    

 

 힘든 노동 후 밀려드는 안락함과 쾌적한 공기, 내 안에서 느껴지는 작은 만족감. 그렇게 큰 욕망인가 하다가도 힘든 노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풀다 보면 이 나라에서 노동이 어떤 의미이며 어떤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지 먼저 체감하게 됩니다.    

 


 이것만은 알고 지나가야지 싶더군요. 노동조합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지만 여전히 노조 가입률이 10% 정도인 이 나라에서 노동조합의 힘만으로는 바위에 조약돌 던지는 투쟁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투쟁하는 그들을 응원하고 있기에 이 영화를 풀어놓고 있나 봅니다.        

 지금부터 정리해보는 ‘노동조합’은 『신자유시대, 노동조합의 역할과 전망』 하종강 교수의 글을 참고로 풀어가려 합니다. 몇 년 전 발표된 이 글에 무게를 두고 싶은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겁니다. 최근 두 정권을 지나가는 중에 나타난 일련의 ‘해고 사태’들로 충분할 테니까요.      


 이제 하종강 교수 글의 일부를 옮겨 한국의 노동조합을 위한 무언가를 찾아내 보려 합니다. 한 권의 책이든 한 편의 영화든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파고들어 공부하는 것부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모르는 게 병’인 시대를 살아가는 여력 없는 한 개인이 유일하게 할 짓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노동 3권과 노동조합. 노동 3권은 통일적 권리입니다. 파업은 법률적으로는 엄연히 ‘노동 3권’에 속하는 ‘단체행동권’의 일부이고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 3권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어 따로 구분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죠. 단체교섭권이 없는 단결권은 무의미한 것이며, 단체행동권의 보장이 없는 단체교섭권이란 종이호랑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노동 3권의 연관성을 ‘통일적 권리’라는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단체교섭을 전제로 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그 존재가 무의미하고, 단체교섭은 단체행동을 전제로 할 때만 자본과 노동 사이에 힘의 균형을 갖추고 진행될 수 있습니다. 단결권은 단체교섭권에 의해서 담보되고 단체교섭권은 단체행동권에 의해서 담보되고요. 지난 노동법 개정에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하나로 묶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으로 틀을 갖춘 것도 경계가 모호한 노동 3권 모두를 하나의 법률로 규정하자는 취지입니다.       

 

 노동 3권을 법률로써 보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권력과 자본이 노동조합을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어째서 세계의 모든 국가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권리를 법률로써 보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헌법으로 노동기본권을 규정하고 각종 특별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최근세의 인류 역사가 200년 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검증했기 때문이죠. 노동조합이란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되는 그야말로 “집단이기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불학무식한” 조직이라면 그 권리를 법률로써 보장할 리가 없습니다.       


 노동자들의 활동이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격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기 때문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죠.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계급적 성격은 한 마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한다 “는 것입니다. 다른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킵니다. 


 신문을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은 대부분 권력과 자본의 이기적 이익을 위한 노력의 결과들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파업의 목적이 오로지 “내 일자리를 지키겠다”거나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결국은 그 노력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죠. 하물며, 노동조합이 사회 개혁을 위한 이타적 목표들을 추구하는 바에는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 세상은 소수의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만의 이해가 무자비하게 관철되는 심각한 불평등 구조를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자신들이 소속돼있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니까요.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2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사회의 특권세력이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죠. 우리 사회 ‘악의 축’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장 확실한 ‘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 노조의 파업이 "정부와 기업의 잘못된 구조조정 정책에 쐐기를 박는다"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거나, 방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민주언론 쟁취"라는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일자리를 지키겠다"거나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그러한 노력이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죠. 


 노동자들의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일반의 선택’이 ‘권력과 자본 일반의 선택’보다 우선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습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행위처럼 보는 시각이 팽배한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종강 교수의 책을 옮겨와 정리를 해봤습니다. 어느 정부든 노동개혁을 부르짖습니다. 노동자의 삶이 나아질 수 없는 노동 개혁은 헛짓인데 그놈의 헛발질로 사람은 없고 노동만 있는 노동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죠. 상식적으로 노동개혁이 '개혁'이란 말로 제 힘을 발휘하려면 '재벌개혁'은 필수입니다. 요즘은 슬그머니 재벌이란 말보다는 그룹이라는 말이 더 눈에 띄긴 합니다만. 이거나 저거나 거대한 권력을 갖고 마구 휘두르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노동자로서 치열하게 살아오지도 못한 주제에도 이것만은 알 수 있어요.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그나마의 실천 중 하나가 노동조합 가입이라는 사실이죠. 물론 노동이라는 의미를 근로라는 비주체로 밀어 넣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의식 변화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먼저 해 볼 수 있는 나의 권리 찾기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끌어안아야만 가능합니다.      

 

 영화 <실크우드>는 1983년 제작된 마이클 니콜스 감독 작품입니다. 35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가 당면한 노동 환경과 노동 존중은 어떤가 생각합니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사실만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노동자와 한국 사회의 건강한 경제를 이끌어 갈 노동조합을 위하여 비노동조합원이라 해도 나는 그들을 적극 지지합니다. 노동을 위한 나의 삶이 아름다운 노동으로 공동체 안에서 지속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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