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로드 캐스트 뉴스 / 제임스 L. 브룩스 감독
1948년 5·10 총선거 결과로 탄생한 제헌국회가 헌법안을 통과시키고 국회의장이 이를 공포해 ″국가 최고법″을 제정한 지 70년이 지났습니다. 국민 또는 공중이 필요한 정보를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입수할 수 있는 권리를 ‘알 권리’라 합니다. 7월 17일 70년 생일을 맞은 주인공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죠.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③ 통신·방송의 시설기준과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④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정보화 사회로 진행되면서 정부 권력은 더 강화됩니다. 매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일반 시민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가운데 표현의 수단을 잃고 중요한 정보원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에서 생활 정보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얻는 것이 중대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권리’는 현대적 인권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권리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가장 우선적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인 ‘참여’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데에서 찾아집니다. 주권자로서 국민은 정치적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와 소통의 공론장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현실은 매스 미디어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특정 이익 집단에 의해 운영되어 ‘알권리’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언론 기관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이 영화는 방송사에 근무하는 두 남성과 한 여성의 일과 사랑 그리고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줍니다. 여자 주인공은 실제 1984년 당시 CBS의 백악관 담당 PD인 수잔 지린 스키입니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들 삶을 통해 정직한 보도에 대해 메시지를 던집니다. 자유 언론은 사상과 의견의 자유 시장을 창출하는 언론의 자율성을 뜻하지만 전제되는 것은 ‘방송인의 윤리’입니다.
공익 언론은 모든 권위에 대해 환경 감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단순한 이윤 추구의 사기업성을 벗어나 시민 사회의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건전한 언론 풍토는 그 사회가 갖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체들에 의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의 공중파 방송은 상업성에만 치우쳐 자본과 국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려 꿈틀거리기는 하나 봅니다.
방송의 질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언론인의 사명감도 역시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을 한국 사회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직무유기는 저널리즘 실종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여전히 가짜 뉴스나 프로파간다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그나마 IT 환경이 좋은 한국 사회는 대안 방송 팟 캐스트나 1인 미디어와 시민단체 활약이 눈부십니다. 언론을 무조건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알권리'는 개인이 발휘할 비판력에 따라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에서 제인은 훗날 메인 앵커가 되는 톰이 여성 폭행 피해자와 인터뷰했을 때 카메라가 한 대였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 당시 방송 중 톰의 눈물이 연출하여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죠. 그녀가 톰에게로 향하던 마음은 거기서 멈춥니다. 언론이 진실만을 보도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언론인에게 기자 정신은 최후의 보루이기에 간절하죠.
“폭행 피해자 테이프를 봤어요. 이젠 알았어요. 나중에 따로 연기했더군요. 당신은 방송인의 윤리를 저버렸어요.”
“특별해지기 위해선 할 수 없었어.”
“그게 나와 다른 점이에요. 뉴스의 진실성이니 왜곡이니 조작이니-.
언론의 사명은요?
악어의 눈물. 언론이 특별하다는 것은 권력이나 사익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공익을 지키기 위해 대항하는 사실 보도로 얻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죠.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시민사회로 변화 가능하게 한 동력은 저널리즘 정신을 만들어낸 신속하고 정확한 뉴스였으니까요.
자기의 입장,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물을 보는 입장이 서로 달라집니다. 사회적 가치가 개인적 이해관계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을 바탕으로 언론 역할이 작동되는 것이지요.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했을 때 어떤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어 사회 정의를 비틀거리게 하고, 침통하게 만드는지는 세월호 참사 보도 행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주류 방송과 신문들이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길목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되어 사람의 눈을 가리는데 급급했죠.
정부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진실을 알고 있을까요? 최근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서 사회적 신뢰가 사라졌을 때 만나던 불안 징후. 과거 프레임으로 현재를 재단하려는 세력들이 유포하는 정보는 심각합니다. 진실은 실종되었고 드러난 사실은 조작된 사회, ‘불편한 진실’이란 말로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미국은 1774년 7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습니다. 이어서 1787년에 ‘미합중국 헌법’이 공포되고, 1789년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지도로 연방국가가 발족했죠. 지금 미국은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선도하고 정보화 사회가 가장 발달했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 미국에서도 저널리즘의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은 한국 사회의 언론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는 그런 위기의 원인에 대해 성찰하려 하지 않는 자세라 볼 수 있죠. 주류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자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해관계로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를 지속해오면서 저널리즘이 침몰했습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행하는 일들에 시민들의 역할에 관해 묻고 있는데 그동안 대한민국 언론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왜곡보도와 물타기로 이슈를 비껴가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촛불의 힘으로 새 정부를 만들었고 ‘시민’이라는 말을 ‘민중’으로 바꾸어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국가 주도하에서 지배받는 국민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을 지닌 ‘민중’으로서 역할을 모색하고 한국 사회에 퍼져있는 말의 ‘틀’을 이용한 프레임 전략으로 언론을 호도하는 약삭빠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민주언론 시민연합은 '언론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최근 민언련에서는 ‘참담한 언론 계엄 계획, 제대로 수사하고 보도하라’는 논평을 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언론장악 계획이 담긴 기무사의 세부 문건은 명백하게 헌법 질서 파괴를 획책한 위헌 행위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민언련은 언론에도 경고를 합니다. ‘계엄사 보도검열은 언론이 가장 큰 목소리로 비판하고 보도해야 마땅한 이슈라는 거죠. 이런 이수마저 외면하거나 문건의 의미를 축소 혹은 두둔하고 사안의 본질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언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는 논평입니다. 검열받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고요. 격동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아직까지 백성으로 남은 세대까지 생각한다면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저널리즘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고 자신을 통제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저널리즘의 존재 원칙에 대해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즘이 권력과 결탁하면 ‘진실’은 ‘거짓’으로 쉽게 둔갑하게 됩니다.
정보혁명시대 언론 위기는 손석춘의 『민중 언론학의 논리』에서 근거로 제시한 것들로 들 수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 결과에서 찾을 수도 있거든요. 취재 현장을 뛰는 기자들 스스로 한국 신문, 방송에 대해 높은 신뢰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진실을 확연하게 드러내 주었다는 점이죠.
사회 지식인이 그 책임을 기꺼이 지려 했기에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존 언론사들이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을 진단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안으로 ‘저널리즘의 가치 복원’을 강조하고 있는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근거를 제시해 줍니다.
한국 사회에서 저널리즘 문제는 심각합니다. 정보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알 권리’는 정보의 기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호’들로 진실을 비틀어 버리는 일로 잘못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죠. 정보에 대한 진실성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렇기에 저널리즘의 존재 원칙을 분석하는 잣대나 기준은 결국 철학의 문제, 윤리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저들이 이해관계로 짜 놓은 틀에 갇히는 순간, 정보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는 ‘바보’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스로 ‘직접 언론인’이 되려는 자기인식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기도 하죠.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고하게 하기 위하여 대안 언론들과 민중의 공감과 연대가 이 나라를 지켜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2018년 한국사회에서 너덜너덜한 헌법 정신을 잘 잡고 갈 수 있을지 사법부를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여전히 의문이긴 합니다.
그저 허울 좋은 정의에 펄럭이는 제헌절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태극기는 공허합니다. 의례적으로 제헌절 기념식을 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 뿌듯하게 축포를 쏘며 정의의 저울이 수평을 유지하는 모습에 축하의 박수를 칠 수 있으면 합니다. 누군가의 헌신과 피 흘리며 지킨 대한민국 헌법 정신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열어 주겠지요.